당신의 시 '이원석 시인'

이원석시인의 시 업무 외 일지 외 4편

이원석시인의 약력

 

이원석 : 2020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 등단. 시집 앤딩과 랜딩이 있고 시를 쓰며 주짓수를 가르칩니다.

 

 

 

업무 외 일지

 

이렇게 지독한 마음을 네가 만들었어

 

컨테이너에 돌아와

렌치가 달린 팔을 분리해 놓으면

선반에 놓인 팔이 가려웠다

세척이 필요한 부품도 있었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불을 켜지 않고 오래 앉아있어도 상관없었다

그러고 싶지 않았다

 

네가 떠난 후

내 안의 회로를 분해해보기 시작했어

오차 없이 정밀하게 작동하도록 설계되었는데

톱니는 톱니와 꼭 맞물려

빈틈없이 돌아가고 있었는데

작은 쐐기가 톱니 사이에 떨어진 걸까

 

B1이 멈추면 D3가 멈추고

D3가 멈추면 F4도 멈추기 마련

네가 멈추면 모두 멈추는 것

애초에 마련해둔 기능이 아니었는데도

 

고장 나기 직전까지 나를 붙들고

놓아주지 않던 사람과

고장 나기 직전인 나를 붙들고 

놓지 않아 준 사람

 

감사하다는 말을 너무 많이 한 날에는

아무에게도 감사하지 않았다

  

생각지도 않게

결합된 합금의 표면이 가려웠다

금속과 금속이 함께 용융되지 못했나보다

부품과 부품 사이에

꼬챙이를 넣어 긁고 싶다고

사람이나 다름없는 이야기를 했다

사람도 아니라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그럴때면 꼭 사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가끔은 사람이었으면 했다

둘러보면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사람도 사람 같지 않았다

 

가기로 한 도시에는 가지 못했다

분수에 맞지 않은 행동을 하다 사람들의 미움을 샀다

눈을 마주치면 손이 올라왔다

고개를 들지 않도록 프로그램을 수정했다

 

 

 

로이의 미로

 

빈틈없이 조이고 가려던

로이가 F10-411 에서 길을 잃었다

공중도시에서 내려다보면 지상은 짓이겨놓은

케이크 같았다 마구잡이로 들어선 공동주택들은

해가 지면 조심스럽게 반짝였다 해가 갈수록

창문은 작아져만 갔고 사람들은 어둠에 익숙해졌다

밤에도 낮처럼 빛나는 공중도시의 밑바닥엔

전선이 레일을 타고 이어졌고 레일은 터널을 따라 굽이쳤다

하수관은 또 다른 터널을 따라 이어지다가

지상으로 내용물을 게워냈다

 

조금씩 멀어지는 것

듀이는 친절했지만

매번 그럴 수는 없는지

공중도시의 일은 처음이라 그를 의지했는데

첫 매듭에 성공했을 때 그와 기뻐하고 싶었는데

 

Why didn’t you stop me?1)

당신의 혼란을 이해해 나의 부족함도

손가락들이 더 이상 내 말을 듣지 않을 때

결속선이 한 가닥씩 끊어지며 제 일을 잊을 때

전선들이 제각각 다른 꿈을 전송하기 시작할 때

 

듀이는 원망의 눈빛입니다

친절이 참을 수 없는 실망입니다

로이의 약함은 로이가

혼자서 감당할 절망입니다 로이가

730개의 결손을 처리하고 3급 사원이 되어

 

동료들과 술잔을 부딪힐 때

듀이는 반대편 외벽에 매달려

연락이 닿지 않았습니다

오래된 파이프에서 들려오는

듀이의 핸들 소리가

겁에 질려 뒤돌아본 로이의 귓가에

아주 작게 들렸을 뿐입니다

 

소리를 들었어

이봐 여길 보라구 우리가 던지는 술병이

저 아래 깜빡이는 불빛 속으로 사라지는 소리

유리처럼 부서지는 게 뭔지 똑똑히 봐두라구

바닥에 닿을 때

흩어지기 전에

겁에 질려 사방으로 도망치는 실금이

표정처럼 하얗게 번질 때

 

사람은 술병처럼 사라져

한두 병쯤 마셔도 비워도 던져도 떨어져도 흩어져도

다들 잘 지낸다고

 

Why didn’t you stop me?

밤새 파일을 뒤져도 너는

반대편의 외벽에

밤새 외벽을 뒤져도 너의 이름은

파일에

 

서로의 손목을 잡는 결속으로

서로의 구원이 되고 싶었는데

왜 너는 나를 멈췄지?

왜 나를 멈추지 않았지?

 

1) Mitski의 노래 제목

 

 

 

시소

 

빨리 여름이 왔으면 좋겠어

겨울은 무장한 채로 슬프거나 힘들었으니까

숨은 듯이 창을 닫고

찬물에 발을 담그는 기분으로 책상에 앉아있을 필요는 없을 테니까

 

여름이 오면 한적한 거리를 천천히 걸어도 될 거야

값싼 티셔츠를 세 개 살 거야

글씨가 없고 사람 얼굴이 없는 것

내가 배운 원칙

검은색, 혹은 더 검은색으로

 

아무도 없는 놀이터 시소 위에

종이컵에 담긴 커피와 다시 읽은 책을 놓아두고

천천히 기우는 양팔 저울을 생각하며

발을 구를 거야

 

그때는 소서쯤일 거야

받쳐 놓은 것들이 모조리 깨져버린 오후에

창을 열고 잔에 술을 채워야지

손을 잡아달라는 게 아니잖아

서로의 목소리가 들릴 만한 거리에 흔적없이

남아있자 가끔은

고쳐 쓴 일기를 바꿔 읽으며

악의 없는 핀잔을 하자

 

기운다는 것은 쏟아질 준비가 되었다는 것

종이컵에 담긴 커피가

 

난간 아래를 천천히 내려다본다

처음부터 다시 읽은 책은 각오가 되었다는 듯

흉내 낼 수 없는 억양으로 펄럭이며

위치를 가늠하다 돌아눕는다

 

당신이 원하는 2급 자격증을 따기 위해

노력했어요

 

네가 일어서버린 순간

내가 낙하하는 순간

 

 

 

검은 비닐봉지

 

검지와 중지에 걸린

비닐봉지가 천천히 흔들린다

심부름을 가던 중이었는데

사방이 어두워진다

콧노래 소리가 미세하게 떨리고

아까 여기서 고무줄을 넘던 아이들

어디 갔지 끊어진 고무줄 조각과

멀리서 사그라지는 웃음소리만

 

신은

내가 실수하기를 기다리며 지켜보다가

뒤에서 검은 비닐봉지를 씌웠다

사방이 어두워진다

 

너는 바람에 날리던 비닐봉지가 우연히

내 머리를 덮쳤다고 이야기하고 싶은 거지

 

살고 싶다는 뜻이 아니야 죽기 싫어

 

아이들은

사람이 없는 골목에서 휙 하고 날아오는

검은 비닐봉지 노래를 지어 부른다

 

너는 내가 어두운 사람 없는 골목을 혼자

들어선 것이 문제라고 이야기하고 싶은 거지

 

죽고 싶다는 뜻이 아니야 살기 싫어

 

이따위

검은 비닐봉지는 부끄러움을 모른다

끝까지 가지 않을 거야

그건 신도 마찬가지

내가 가지 않을 것이므로

 

얼굴에서 자란 손가락이 비닐을 찢는다

한 조각도 남기지 않을 것이다

 

 

 

로이가 로이에게

 

당신이 나를 만들었습니다

파이프 렌치를 사랑하게 됐을 때

양철 대야에 손을 씻기고 

렌즈가 반짝일 때 

그건 눈물이라고 당신이 가르쳤지요

   

그래요 갑시다

늦은 밤 가볍게 맥주 한잔을 하고

근처 영화관에서 달이 나오는 영화를 봅시다

거실은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낡은 물건들로 채웁시다

벽에 선 세로줄이 보기 싫으니

바래지 않는 흰 종이를 가로로 바릅시다

 

로이가 로이를 만들었을 때 떠올린 것은

가장 일치하는 로이로 하나가 되는 것

같은 규격의 나사를 씁니다 같은 크기의 기판에 

같은 마음을 꽂습니다 잘못 이어진 전선은

그대로 둡니다 잘못은 그대로 전해집니다

같이 틀리고 같이 잘못하여 같은 곳에 도착합시다

로이는 서로의 다른 점이 맞물려 하나의 온전한 외곽을 이루는

그런 사랑을 원하였으나

이가 맞물리지 못하면 서로를 물게 된다는 것을

어렵게 깨달은 후에

로이를 만들었다 가장 일치하는 부속들로 이루어진

로이를 로이는 사랑했다

 

너의 눈이 나를 지켜보고 있을 때

눈동자처럼 나를 보호하겠다던 신이

내 눈을 찌를 때

 

당신을 모방하는 로이를

당신은 사랑하지 않는군요

로이는 당신을 따라하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다를 겨를이 없는데 나의 고백은 다름이 아니오라

당신을 모조합니다 일생에 걸쳐

천천히 인쇄되는 문서를

당신은 반려합니다

사실은 한 번도 마음에 든 적이 없다는 사실이

도착합니다

당신이 빛이 있으라 하매

빛이 있으나 한쪽은 더욱 깜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