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시 ‘손병걸 시인’

손병걸시인의 詩 이름 없는 뼈 외 4편

손병걸 시인의 약력

 

2005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등단

시집

-푸른 신호등(문학마루 출판)

-나는 열 개의 눈동자를 가졌다(애지 출판)

-통증을 켜다(삶이 보이는 창 출판)

-나는 한 점의 궁극을 딛고 산다(걷는사람 출판)

산문

-열 개의 눈동자를 가진 어둠의 감시자(솟대문학 출판)

-내 커피의 농도는 30(작가마을 출판)

수상

-구상솟대문학상 

-대한민국장애인문학상

-청민문학상 

-민들레문학상 

-전국근로자문학상

-장고협 국회의장상

-대한민국장애인문화예술인 국무총리상

-중봉조헌문학상 등

 

 

이름 없는 뼈 -의병의 편지 1

 

강기슭에서 뼈가 발견되었다 아무도 이름을 알 수 없었다

푸석푸석한 뼈는 할 말이 없고 조정에서는 의견이 분분했다 

오래전 무너진 돌무덤 속에 의()로운 침묵은

보이지 않는 바람 속에서 간간이 쟁쟁했다 

는개비가 내리고 축축이 젖은 바람은 

움푹 파인 돌 틈에 고이고 고였다 

순한 뼈는 켜켜이 흐르고 흘러 

시푸른 강물처럼 역사를 완성했다 

나는 오늘 펼쳐진 역사의 한 페이지를 읽으며 

새삼 문장이 명백한 그림이라는 사실을 직시한다

시린 강물에 손을 씻듯 상형문자를 어루만지는 오후 

강기슭 배롱나무에서는 상큼한 꽃향기를 쏟아놓지만 

일렁이는 모래톱에서 피비린내가 진동한다

무너진 돌무덤을 휘감는 물의 파열음은

성곽 위 가마 속에서 기름이 튀는 소리처럼 

벌건 귓가에서 먹먹하게 붉다 

지나면 아름다운 그림 같은 단 한 줄의 역사

이름 없는 뼈들이 활자로 일어서는 글귀쯤에서

나는 죽음을 함부로 듣고 해석한 날들을 후회한다 

단 한 번도 돌무덤의 죽음을 헤아린 적 없었던

시퍼런 내 이름 석 자가 수심(水深) 속에 잠긴다

 

 

 

아내의 입덧 -의병의 편지 2

 

내 고향 초가(草家) 뒤란

장독대 위 정화수 그릇 속에도 지금

저 둥근 달이 두둥실 차오르겠다

두 손을 맞대고 지그시 눈을 감은

아내의 배도 만월(滿月)이겠다

 

내가 숱한 전장(戰場)을 누비는 동안

아내의 입덧은 저무는 달을 꾹꾹 채워

산달에 이르렀듯

아물 틈 없는 내 상처에도 피고름이 속속 차오르고

살이 썩는 통증만큼 헛구역질이 멈추지 않는다

 

잠시 쫓겨간 적들이 또다시 거세게 밀려오고

불안한 만삭의 달이 핏빛으로 물들어갈 때

입덧처럼 솟구쳐 오르는 생목을 삼키며

나는 있는 힘을 다해 죽창을 다시 움켜쥔다

 

성곽 아래 적의 시신이 쌓이고 쌓이지만

끝내 만월(滿月)이 사그라지듯

나는 이름 없는 의병이 되어 저물어 가고

별빛 사라진 먼 산꼭대기에서

겹겹이 쌓인 어둠을 헤치고 걷으며

갓난아기 울음소리 우렁찬 아침이 밝아온다

 

 

 

따뜻한 흙 -의병의 편지 3

 

나는 글을 모른다

전장(戰場)에서 생긴 숱한 칼자국으로

고향집에 편지를 쓸 뿐이다

 

어젯밤 내 몸에 새겨진 칼자국은

고향 초가(草家) 마당 한 그루 감나무에서

붉게 익어가는 홍시를 지키기 위함이다

하얀 연기 피어오르는 굴뚝 아래

어린 눈망울들과 둘러앉은 단출한 밥상이

내가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할 충의(忠義)이다

 

움켜쥔 나의 무기 괭이 한 자루는 

아내가 이고 온 새참을 안주 삼아

막걸릿잔 들이켤 이랑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 이랑에는 채 캐지 못한 뿌리 열매들이며

뒷산에는 머루 다래가 익어갈 것이다

 

매캐한 화염(火焰) 속에서 눈을 부릅뜨고

적의 칼날을 한바탕 받아내는 

나는 반드시 두고 온 고향으로 돌아가

햇볕 머금은 흙에 씨앗을 뿌려야 할 농부다

 

 

 

바람의 발자국-의병의 편지 4

 

돌무덤 사이에서 일어난 바람이

땀에 젖은 내 이마를 밟고 간다

 

얼른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돌리자

강기슭을 차오른 바람의 맨발이

커다란 저녁달 속으로 들어간다

 

오래된 핏빛 바람을 품듯

출렁, 그날도 보름달이 떴겠다

나는 어디쯤에서 신발을 벗고

어디쯤에서 묘연해질까

 

스르르 눈꺼풀을 감듯

문필봉 꼭대기에 걸린 어둠이

하늘 가장자리부터 곱게 펴진다

 

산등성이에서 커다란 눈을 뜬

그윽한 샛별의 생각만큼

나도 이즘에서 목숨을 걸면 빛나는 바람이 될까

 

분기탱천한 눈동자를 닮은 별들과

수백 년 전 이야기가 한 소식 같아서

봉인된 이야기가 뜯어져 빛날 때

너무 멀쩡히 살았다는 내 반성이 반짝 켜진다

 

이름 모를 돌무덤 즐비한 강기슭에서

꼼짝없이 붙잡혔던 내 발걸음이

그제야 강 건너 길 끝까지 가닿을 듯

싸늘히 식은 이마가 따뜻해진다

 

 

 

문필봉 출사표 -의병의 편지 5

 

문필봉 꼭대기에 먹구름을 찍어

일필휘지 써내려간

분기탱천한 출사표에는

봉기한 백성의 순한 얼굴들만 있다

 

구중궁궐은 귀를 닫은 벽이었고

드잡이를 벌인 고위관리 조정에서

시시때때로 충의(忠義)를 상명(上命)할 때

백성들은 진실로 고분고분 하복(下服)했다

 

끝내 고위관리 얼굴들은 전장(戰場)에 없고

버림받은 백성의 유일한 전략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

 

숱한 침략에 맞서 이 땅에 서슴없이 피를 뿌린

아버지와 아버지의 혼으로 펼치는 전술

그것이 가장 큰 마지막 병법이어서

맑은 물 흐르던 계곡에 핏물이 넘쳐흐르고

아름다운 산기슭에 돌무덤이 늘어가지만

오라, 얼마든지 오라!

 

그날의 목소리 쟁쟁하게 들리는 듯

산꼭대기에 우뚝 선 적송들

붉다, 하늘을 찌를 듯한 빼어난 고집

비바람 눈보라 속에서도 꼿꼿이 붉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