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시 ‘정진혁시인’

정진혁시인의 詩 연애의 언어 외 4편

정진혁 시인 약력

1961년 충북 청주 출생. 공주사범대학교 국어교육과 졸업. 2008내일을 여는 작가등단. 2009년 구상문학상 젊은 작가상 수상. 2014년 천강문학상 수상. 2013, 2018년 아르코 창작기금 수혜. 시집 간잽이, 자주 먼 것이 내게 올 때가 있다, 사랑이고 이름이고 저녁인이 있음.

 

 

연애의 언어

 

벚꽃의 영역과 물의 영역 사이에 생긴 낙서 같은 것

 

물가에 서 있는 벚꽃은

 

이 세상에 하나뿐인 말을 흔들고 있었다

 

그날 대성리 물가는 세상의 경계선이었다

 

밤늦도록 벚나무 아래에서 놀다가 우연히 그것을 건드리고 말았다

 

벚꽃 물가 라는 말이 밀려온다

 

때때로 남서풍이 부는 물가에 가늠할 수 없는 울림

 

박각시나비와 휘어지는 강물은 알 수 없는 언어로 허공을 다녀온다

 

언어 몇 송이가 물 위에 떠 있다

 

 

 

사소한 동그라미

 

 파도 소리가 들리는 펜션에서 술을 마시는 밤이다 네가 별안간 일어나 우리의 둘레를 빙 돌며 동그라미를 그리더니 말했다

 

 우리 이 금 안에 있는 것들과 이 금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다 기억하기로 해

 

 그 안에는 와인과 치즈 몇 조각 책 몇 권과 포인세티아 그리고 너와 우리가 있을 뿐인데

기억할 것도 없네 뭐 나는 단순하고 덜렁댔다

 

 우리들의 모든 것을 알고 싶어 웃음과 손짓 하나조차 관계 속에 있다는 것 창밖을 보는 눈길 하나에서도 지금과는 다른 식으로 살아야 한다는 걸 알고 싶어

 

 넌 우리를 피곤하게 했다

 

 네가 그린 동그라미 안에서 사소한 하루가 커져 간다는 것을 난 알지 못 한다

 

 여기는 홀로 꽃이 피고 홀로 눈발이 날리고 홀로 파도를 일으키는 곳이야 고립과 관계의 지도가 그려진 곳이야

 

 너는 파도 소리처럼 끝낼 생각이 없는 것 같다

 

 우리의 사소함은 책의 페이지처럼 넘쳐났다 책속의 사건처럼 다양해졌다 동그라미는 자꾸만 커지고 포인세티아 잎처럼 초록이 붉음이 한 없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문득 부족했다

 

 저녁에 먹은 굴 향기도 몸도 없이 떠도는 일도 다 기억하기로 해

 

 사소한 생각 사소한 탄성 사소한 난처 사소한 연애 모든 것이 사소한 동그라미 안에 있다는 걸 나는 모른다

 

 

 

 

비상시 문 여는 방법

 

내 몸 속에 비상사태가 생겼을 때

나는 나를 여는 방법을 모른다

내 속에서 화재가 생겨도

내 속에서 테러가 일어나도

 

출입문 우측 덮개를 열고

빨간색 스위치를 오른쪽으로 돌리면 열리는 출입문이 내게는 없다

 

내 속의 모든 기억들이 도미노처럼 무너져도

 

나는 나를 여는 방법을 몰라서

이 장치를 비상상황이 아닌 경우 조작하면

철도안전법에 따라

2년 이하의 징역 또는 2천만원이하의 벌금에 처하게 될 범죄도 저지를 수 없다

 

속이 범람해도

누군가 총을 난사해도

동동거리며 저 속이 다 타도

대설주의보가 내려 꼼짝을 못 해도

나는 나를 열지 못해 나의 밖에서 죽는다

 

저 속에 진짜인 내가 있다는데

한 번 열어 보지도 못하고 죽을 수 있는가

 

비상시 문 여는 방법이라는 안내문을

내 몸 어디에 새겨 넣고 싶다

 

배꼽을 오른쪽으로 세 번 돌리고

왼쪽 젖꼭지를 누르면 출입문을 손으로 열 수 있습니다

 

나는 나를 여는 방법을 몰라서

오늘은 골목에 앉아 봉숭아 꽃잎을 손톱에 붙여본다

 

 

 

 

눈이 멀다

 

너에게 가 닿지 못한 이야기는 다 멀었다

눈에 빠져 죽었다

 

침묵은 보이지 않는 눈의 언저리를 한 바퀴 돌아갔다

바깥이 되었다

 

눈이 멀어서 밤이 멀고 내가 멀어서 그림자가 멀었다

어떤 눈이 나를 송두리째 담아 갔다

 

문득 문이 열리고

306동 불이 켜지고

모퉁이 앵두나무에 앵두가 익어 갔다

 

세상은 공중인데 내 손은 사무적이었다

몇 발자국 세다 보면 길은 끊어지고

손끝에 닿는 대로 기억이 왔다

 

눈이 고요하였다 끝이 넓었다

나는 고요를 떠다가 손을 씻었다

아카시아 향기 같은 것이 종일 흔들렸다

 

마음 하나가 눈언저리에 오래 있다 사라졌다

누가 먼눈을 들여다보랴

 

눈은 멀리서

볼 수 없던 것을 보고 있다

먼 오후가 가득하였다

 

아무리 멀어도 더 멀지는 않았다

 

 

 

 

나무에는 사슴이 살고 있다

 

벚나무는 모든 움직임에 사슴을 품고 있다

사슴 무늬가 벚꽃으로 벙글어진 저녁은

어디에도 없는 사슴의 향기가 난다

헛헛하고 퉁방울 같은 고요가 인다

 

밤의 뿌리에서 사향 냄새가 난다

그리움이 너무 두꺼워

나무는 온몸으로 사슴 무리의 호흡을 느끼며 한 걸음 한 걸음 걷는다

 

사슴의 꿈이 몽글몽글 꽃으로 피어난다

벚나무는 지금 제 꿈을 대지에 흩날리는 것이다

사슴은 나무의 대륙을 달린다

 

나무껍질에 골골이 나 있는 길은 사슴이 지나간 흔적

나무 안에서 목을 축이고 풀을 뜯는 법을 아는 사슴 무리는

먼 곳을 바라보다가 머리가 간질거리며 뿔이 돋아난다

뿔에 이끌려 희열처럼 위로 위로 달리다

더 나갈 수 없을 때

비로소 나뭇가지가 되어 자신을 매단다

 

그리고 나무는

귀 없는 겨울을 보낸다

 

푸른 잎들이 사슴의 귀가 되어 흔들린다

사슴의 무리는 밤마다 나무에서 달빛 그림자로 내려와

유유히 풀을 뜯는다

풀밭 위에서 이리저리 흔들리는 수천의 사슴 무리를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