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시 '오정순시인'


오정순시인의 詩 한 마을을 장사葬事하다 외 4편

오정순시인 약력

 

충남 예산 출생. 재능대학 문예창작과졸.

사이버대학 사회복지학, 외국어로서의 한국어학 수료.

중앙대 예술대학원 문예창작전문과정 수료.

개인시집 수신인은 나였네』 『그곳에 가면』 『전설을 덥석 물다

우주가 들어있는 작은 공을 찾는다

2019, 2021년 인천문화재단 문학창작지원금 선정

 

 

한 마을을 장사葬事하다

 

온 마을이 꽃으로 올라왔다

 

유리그릇에 담긴 된장에서 꼬물거리는 생명체

방충망에 유리문까지 어떻게 열었을까

보낼 방법을 모색하는 동안 대가大家를 이루더니

몇몇은 갈색 몸을 열어 날개를 단다

 

화단을 깊이 파고 장례를 준비한다

뚜껑 열고 엎어서 넣으니 유리관

화려한 장례식이라고 불쌍해하지 않기로 한다

 

꽃 한 송이 없어 관심 밖이었던 이팝나무

작년까지 이파리만 듬성듬성 붙이더니

나뭇가지에 낯익은 생명체를 매단다

 

기억을 지울 동안 땅속에서 여러 마을 이뤘나

몇 마리 슬쩍 올라와 망보더니

날마다 떼 지어 올라온다

대놓고 하얗게 쳐들어와 덤벼들 기세다

눈을 감아도 앞을 가로막는 하얀 군대

발효된 된장 냄새가 머릿속에서 꼬물댄다

 

어둠도 아직 꿈속에 있던 시간

쌀독 긁던 소리 한 숟가락 넘기고 떠난 아버지

엄지손가락 한 마디 없는 손으로 내민 월급봉투가

엄마 손에서 경련을 일으켰다

 

식구들 숫자만큼 올라왔던 하얀 쌀밥이

상다리가 휘어지도록 고봉으로 매달린다

 

 

 

구슬

 

소나무 등에 업힌 매미 껍질

영혼을 보낸 허물은 정지된 계단입니다

갈색의 눅눅한 땅속 기억은 비어가는데

저곳을 밟으면 마른기침 소리 나겠지요

투명 계단에 한발 살짝 올려놓으면

다른 발 올리기가 겁나요

바스러질 것 같거든요

 

조심조심 내려가다가 문득,

저 아래엔 지하가 있을 거라는 상상을 해요

누구도 말해주지 않아 들어가면 안 되는 비밀의 장소

그곳에는 작은 공이 있을지도 몰라요

온 우주가 들어있는 그 작은 공을 찾고 싶어요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와 풀어야 할 숙제가

산처럼 쌓였거든요

 

여긴 너무 컴컴해서 더이상 찾을 수가 없어요

까치발하고 올려다보니 구슬이 보여요

저 알렙*은 계단 아래에 있지 않고 꼭대기에 있었어요

보르헤스가 속인 걸까요 구슬이 점프한 걸까요

 

성큼 다가온 저녁이 눈에 노을을 넣었는데요

눈동자 속에 두 개의 구슬이 들어와

우주를 담고 빙글빙글 돌고 있어요

 

어지러웠던 이유를 이제 알 것 같아요

그 속에서 나도 함께 돌고 있었거든요

 

그런데요

혹시 쌍둥이 알렙을 보셨나요

 

*보르헤스 전집 중 3알렙에 들어 있는 단편소설. 온 우주가 알렙이라는 구슬 속에 들어있다는 내용이다.

 

 

 

공존

 

벽이 물고 있던 녹슨 못을 놓는다

바닥으로 뒹구는 벽시계는

온몸 맡기고 의지했는데 변심했다 원망하지 않는다

그 마음을 알 만큼 함께 어깨동무하며 걸어온 나이

 

드러난 속은 아직 심장의 온기가 남아있는데

안내하던 초침이 구부러져 제자리걸음이다

맞물린 톱니바퀴도 한 발 올렸다 떨어지기를 반복하고

분침 시침도 그 자리에서 헛손짓만 한다

 

작은 바퀴가 돌지 못하면 맞물린 시간은

큰 바퀴까지 물고 늘어져 아무리 걸어도 제자리걸음

 

굽었던 초침 곧게 펴니 톱니가 멈췄던 발걸음을 뗀다

톱니에 매달린 시침이 한 발 옮기자

맞물린 바퀴도 걷고 뛴다

 

종이옷 입힌 못, 그 자리에 다시 박는다

벽은 시계를 힘있게 붙잡고 벽시계는 편안히 기댄다

서로의 체온이 만나 따스해지고

절도있는 달리기를 시작한다

 

 

 

혀 밑에 숨긴 말

 

투박한 손에 잡힌 부지깽이가 움직일 때마다

소란스러워지는 혀 같은 불꽃들

저마다 일어서서 뜨겁게 열변을 토한다

아궁이 앞에 앉은 늙은 어미에게

한마디 해보라고 뜨거운 혓바닥을 길게 빼지만

입을 닫은 채 슬쩍 물러선다

 

무슨 말인가 하려다가 그만두던 가마솥이

푹푹 한숨을 쉬자

벌떡 일어선 부지깽이의 심상치 않은 위력에

하나둘 조용히 자리에 눕는 혀

 

솥뚜껑 소리에,

갇혀있던 냄새 사방으로 흩어지고

사태를 파악한 쉰세 살 아들 행동이 제법 빠르다

동치미 한 대접과 고구마 한 접시가

양은 쟁반을 가득 채우며

숟가락 들어올 자리 만드느라 뒤뚱거린다

 

문틈으로 들어온 저녁 햇살은

둘 사이를 가르지 못하고 손등에 내려앉는다

턱받이를 해주고 숟가락을 쥐여주는

어미의 입은 늘 닫혀있다

쉰셋 아들의 천진한 행동에 가끔 웃어 보일 뿐

바람난 남편이 문 앞에 선물로 두고 간

오십 년 동안 성장이 멈춘 아들

 

아들보다 하루만 더 살기를 바라는 어미는

혀 밑에 숨겼던 말 꺼내 놓는다

 

이 아이한테는 내가 하늘이여

나도 저분께 공짜로 받았응께 그중에서 한 줌 주는 것이여

 

 

 

우주 밖의 세상이 궁금하다

 

 우주 밖으로 이사하려고 짐을 싸는 장례식장마다 배웅하는 발걸음이 분주하다 우주를 탈출하는 관이 화장장 화덕 안으로 들어간다 우주 밖을 향하는 좁은 길목을 허연 베일로 숨긴다

 더 작은 것에 갇힐수록 우주 밖의 세상이 가깝다는 걸 우주에 갇히고 나서야 내가 누구라는 걸 알게 되었다 나는 누구인가? 우주 밖에서 떠돌다가 우주의 블랙홀에 떨어졌을 것이라는 것조차 짐작일 뿐, 신의 계획에 의해 우주 속으로 갇혀버린, 갇히고 나서야 우주 밖의 세상이 궁금하다

 

 장롱을 옮기다가 녀석을 발견했다 이미 빠져나간 영혼, 금방이라도 바스라질 것 같은 몸도 우주의 경계선 어디쯤 걸쳐 있으려니녀석의 행방이 묘연했던 건 재작년 1월 초였으니 3년이 지난 셈 아기 거북이는 십 년이 넘도록 한 식구였다 가끔 담을 넘으려다가 다시 거꾸러지기를 몇 년 반복하더니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던 것 거북은 자꾸만 작아지는 환경에 더 넓은 세상을 향한 꿈도 작아졌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거실에서 방으로 침대 밑으로 더 넓은 곳을 향해 느릿느릿 발걸음을 옮겨 마지막 발걸음이 놓인 곳이 장롱의 네 발 중 안쪽 발밑, 잠시 쉬었다가 그렇게 깊은 잠에 빠지니 녀석은 꿈꾸던 세상보다 더 넓은 우주 밖으로 나간 것이다 더 작은 공간이라고 생각한 곳이 더 넓은 곳으로 가는 길이라는 걸 나보다 먼저 알아버린 녀석의 몸에서 우주 밖의 냄새가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