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시 '정상미시인'

정상미시인의 詩 뒤에서 읽는 어깨 외 4편

정상미시인 약력

2013 대구문학시 등단

2021 서울신문신춘문예 시조 당선

2022 년 서울문화재단 창작활동지원금 받음

 

뒤에서 읽는 어깨

 

어깨가 처진 사람과 웅크린 사람 중

누가 더 바닥 쪽에 가까운가요

한 장 한 장

겹겹이 쌓인 어깨를 보신 적 있나요

 

눈부시게 맑은 날과 못 견디게 흐린 날 중

어느 쪽이 어깨의 말을 읽어내기 유리한가요

어깨가 얼마나 두꺼운지

올올이 풀린 감정인지

 

어깨의 낱장을 하나씩 읽다 보면

무겁거나 가볍거나 한 가지 울음만 있죠

어깨는 단순한 몸이라 무게로 말해요

 

쌓일 때와 무너질 때 어느 쪽이 더 아픈가요

천근만근 늘어난다고 팔이 땅에 닿겠다고

알아요

뒤에서 읽는 어깨가 더 슬프다는 걸

 

 

내가 살지 않는 나


뉴욕에 한 번도 간 적 없는 나는 뉴요커
런웨이를 걸어본 적 없이 패션모델이지
뇌 속의 접속 단자가 컴퓨터와 내통해 가공된 나는
타임스퀘어 앞을 누비고 다녀
눈에 힘을 주고 도도한 표정으로 워킹을 하면
화려한 음악과 조명 속에 내게로 쏠리는 시선들
터지는 환호와 플래시는 나에게 구름 방석을 내밀지
나는 살아본 적 없는 과거를 날아다니는 한 마리 새야
달과 화성을 건너다니는 외계인을 지나
남태평양의 타히티 해안에 사는 바다거북이었어
미지의 지난날을 여행하는 건 휘파람이 피는 일이야
우울한 것은 강에 다리를 두고 오는 일이지
어두운 풍경은 의도하지 않은 내가 되기도 해
장난이 심한 오빠가 몰래 나를 바꿔버릴 수 있거든
잠든 사이 내 단자에 나쁜 기억이 이식되어
내가 누구를 죽일까 봐 겁이 나
나는 어디까지 나일까
엉뚱한 내가 나로 살아지는 게 아닌지
엄마 ! 엄마는 본래 내 엄마였나요
현실과 환상의 어느 지점에 나는  있는 것일까
내 몸과 팔다리는 기계와 컴퓨터가 먹여살리지
아빠 ! 나는 얼마나 오래 살게 될까요
죽을 수는 있나요
자꾸만 일어서는 잠을 질근거려
로봇 꾸메는 나의 눈물과 웃음소리를 갖고 싶댔지
어제 그가 내 손을 잡았는데 따뜻했어
그는 점점 인간이 되어오는 것 같아
나는 나를 잃어가나 봐
어렴풋이
돌단풍 피던 어릴 적 생각이 나

 

 

팔짱을 끼다
 
요즘은 그렇다
외로워지고 싶어 팔장을 낀다
 
혼자 팔짱을 낀다는 것은
흔들리는 나를 내가 붙들고 가는 것이다
차가워지는 내가 싫어서
내가 나를 데우는 것이다
 
7 년 사귄 애인이
안개 속으로 들어가 나오지 않을 때
나를 추스르려 팔짱을 낀다
박 팀장에게 서류뭉치로 얻어맞고
내가 나를 어쩔 수 없을 때
기우뚱하지 않으려 팔짱을 낀다
 
팔짱을 끼면 내가 더 촘촘해진다
단단해진 팔짱은
애인에게 긁히고 팀장에게 찔려온 나를
지그시 눌러준다
 
팔짱을 끼면 내가 도도해진다
눈에는 힘을 주고 허리를 꼿꼿이 세운다
애인 같은 거 팀장 같은 거 별거 아니라며
입을 앙다물고 깨진 어깨를 올린다
 
팔짱이 나를 밀고 간다
가끔은 조금 거만해 보여도 좋다

 

 

   납작한 바다

   바다는 가볍게 구워져 입안에서 부서져요
   도토리묵 위에서 흩어지기도 하죠

   한때 갯바위가 되고 싶었던 나는 파도의 음률을 사랑했어요 돌에 뿌리내리고 자란 가느다란 몸을 선호했지요 촘촘하게 펼쳐 놓은 하루를 말려 수평선을 당겨오면 시간의 껍질처럼 포개진 초록 잎사귀들 곡선밖에 모르는 춤으로 출렁이다가 온몸으로 바다를 받아적어요 듬성듬성한 연초록 사이 따개비 놀래미를 보여주기도 하고 비가 오는 날이면 소리를 버리고 슬픔이란 슬픔 죄다 흡입해서 갯내를 뿌려요

   매운 연애의 비렁길을 돌아 심해에 묻어둔 스물세 살의 무거운 말들이 달려 나와요 손끝에서 미끄러지는 기억들 , 얇은 바다를 깔고 밥과 감정을 넣어 돌돌 말아요 

   당신도 결국엔 납작해졌고

   지금은 습기를 버린 얇은 이별의 바다 한 장

   길고 동그란 바다를 하나씩 잘라 내가 했던 말들을 혀에 대고 굴려 보면 이제 좀 바삭거릴까 철썩철썩 짭조름한 몸에서 배어 나오는

   또 다른 나

 

 


 
서울로 가는  밤 버스에서
옆자리의 젊은  남자가 내 자리를 침범한다
 
모르는 사람과 체온을 나눠 갖다니
 
불편이 불온의 턱을 넘실거린다는 착각
 
앞차를 추월할 때마다
어깨를 좁히고 무릎을 오므려 봐도
힘이 풀려 또 접선하는 팔과 다리들
 
가지런함을 유지한다는 건
긴장을 장착하는 일
 
남자는 잘도 자는데 나는 진땀이 나고
도시가 바뀔 때마다 어둠을 편 허리춤엔
소리가 숨어 있다
 
방목한 남자의 팔다리
참을 수 없는 데 참아야 하는 액자에 잡혀
점점 더 밀물이 들어온다
 
혹 남자가 자는 척하는 거라면 어쩌지
모르는 척
잠자는 척
나도 척 농사를 지어 낯선 어깨에 기대 볼까
 
서투른 경계 속에서
내가 부유하고 있을 때
 
당분간 나를
로그아웃
하고 싶을 때
 
불편이 불쾌와 불안에 섞여 놀다가
 
이 닳아버리는 도착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