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연순시인의 詩 골갈빵 외 4편
한연순시인 약력
정읍 출생 .
2000 년 『조선문학』 시 등단 .
전주교대 , 인천대 교육대학원 국어교육과 졸업 .
조선시문학상 , 인천펜문학상 인천문학상 수상 .
강원 무릉도원면 달빛연구소 창작실과 인천을 오가며
작품 활동 .
시집 『방치된 슬픔』(2002), 『공기벽돌 쌓기 놀이』(2006),
『돌담을 쌓으며』(2008), 『분홍 눈사람』(2021)
2021 년 인천문화재단 창작지원금 선정 .
공갈빵
백일몽이라도
잠적한 꿈은 늘 발효를 시도하지
누군가 텅 빈 내용을
먹고 있다
헛된 꿈이라도 잡고 싶은 날
봄볕에 모여든 사람들이
희망처럼 부풀어 오른
산산조각을 먹는다
단 꿀물 흐르는
허공의 메아리를
소주 燒酒 를 생각하며
소주 , 하고 이름을 조용히 부르면
어느새 네가 웃고 있다
소주 , 하고 이름을 천천히 부르면
어느새 푸른 절규가 와 있다
소주 , 하고 이름을 한 번 더 부르면
깨지고 깨진 소주병 조각이 심장에 박혀 있다
핑계대지 마라
안 마시면 되는 일이라고
그리 간단히 , 단호하게
소주는 술술 넘어가는 맹물 맛이라는
은유를 외면하는 동안
한 사람이 떠나갔다
세상 끝자락에서 기다리던 따뜻한 말 한 마디를
지금 텅빈 방이 울고 있다
이름 없는 풀 한포기도 외로움과 다툰다
너는 소주와의 전투에서 대패했다
검은 세상에서 소주보다 맑은 눈을 가졌기에
이제 나는 지독하게 외롭던 소주를 보내야 한다
온 강물이 소주가 되어 함께 울도록 강으로 보내야 한다
집 주인이 소주 , 라는 아픈 이름을
락스로 말끔히 지워 달라고 말하는 동안
문 앞에 쓰러져 있던 빈 소주병들이
커억커억 겨울바람을 울고 있었다
분홍 눈사람
오래된 잿빛 뼈마저
온 동네 꽃잎 내리는 날
나무와 나무 사이
전동 휠체어 한 대 멈춰 있다
흩날리는 꽃잎 음계를 밟고
따라갈 수 없는 마음인가
가슴을 문지르는 그리움에게
말을 걸고 있는 걸까
점심이 지나도록
나무와 나무 사이
한 사람이 그대로 앉아 있다
기억의 빈 문간에 꽂혀 있는
시간의 빛깔
23 분 동안
새벽 1 시 37 분
개가 하현달을 향해 짖는다
그 집 앞에는
강으로 돌아가지 못한
키 큰 지느러미엉겅퀴 꽃이
용궁 수문장처럼 열 맞춰 서 있다
개가 다시 하현달을 짖는다
깨어난 어둠들이 덩달아 달을 향해 짖는다
가이드는 운이 좋으면 분홍고래를 볼 수 있다고 했었지
바다로 돌아가지 못한 운이 나쁜 분홍고래를 두고
달빛 사이로 아마존 강이 흐르고
바다로 돌아가지 못한 분홍고래 울음이
물을 내뿜는다
한쪽 눈만 뜨고 있는 달을 향해
보였다가 사라지는 순간의 꿈
순간의 문장을 개가 짖는 밤
잃어버린 시간이 목줄에 묶인 어둠을
저렁저렁 짖는다
데생 dessin
선 하나 똑바로 긋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가
물결처럼 흔들리는 선
수백 번의 연필이 지나간 뒤라야
그림자 하나
둥근 공에 기대어 쉴 수 있다
지우개로 지워 본 사람은 안다
가고 싶은 길 하나 내기 위해
수 없이 비껴간 길을
수만 번의 사유가 지나간 뒤라야
흰 도화지 속에
마음의 집 한 채 지을 수 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