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시 ‘정우신 시인’


정우신 시인의 詩 미리내 빌라 외 4편

정우신 시인 약력

 

2016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비금속 소년, 홍콩 정원, 내가 가진 산책길을 다 줄게를 썼음.

 

 

미리내 빌라

 

무너져야 완성되는 하루가 있습니다

 

도시에는 죽은 친구도

살아가는 친구도 있고요

 

사과나무가

인부를 애먹이고 있네요

 

나의 청춘은 여기서 끝입니다

 

정육점으로 모인

개와 고양이

동네 사람들

 

신이 부싯돌을 켜는지

저만치 은하수 흐릅니다

 

절망의 지붕을 얼마나 더 높여야 할까요

 

가정에는 죽은 가족도

죽지 않은 가족도 있고요

 

은하수 지나던 방향으로

사과꽃 한없이

휘날립니다

 

햇살은 십자가로 빛나고

 

흙과 자갈의 얼굴로

기어오는

봄이 있습니다

 

 

 

사랑과 환경

 

잉어 두 마리

저수지의 크기를 가늠하며

뻐금거려요

 

논에

쪼그려 앉아

알을 쏟아내는 소년

 

갓 나온 유충의 껍데기에 들어가

온기를 느껴봅니다

 

어디서 죽은 매미들을

물어오는 걸까

 

당신은 나를 까놓고

저수지로 돌아갑니다

 

피부에

물이 닿을 때마다

전기가 돌아요

 

 

 

 

익산 가는 길

 

약 먹고 물 먹고

거울을 보며 우린 더 살아야 하지 웃고 울어봐

날벌레는 아니지만

돌고 돌아 겨우 여기까지겠지 아이가 무심코 엎지른 컵에 붙어 허둥거리겠지

나를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삶은 절차 없는 긴 장례식이었지 우리가 걷는다는 것과 먹어야 한다는 것 계속 자야한다는 것

동정과 비난과 환희 속에서 숲과 하천과 산책길 그리고 울음 속에서

죽음이 나를 이미 다 파먹어서 죽을 수가 없네

약 먹고 물 먹고

아직 첼로는 켜지 말고 자화상을 그려봐 자유로워지는 순간, 열리는 시간에서

물은 자신의 맛을 알고 싶어 할까

물의 속성

불을 마시려는

나의 사랑에게

아무 할 말이 없어서 끄적여보는 밤

교육 시켜주세요 더욱 커다란 용기와 확신을 주세요 기도하는 밤 외쳐보는 밤

한 계절 창가에서

지내다 보면

잃어버린 귀 한쪽을 찾아 떠도는 바람이 온다

물 먹고 약 먹고

우린 더 살아야 하지 병원비와 공과금이 밀리는 방식으로 인생을 늘려야 하지 아이의 미래가 나의 과거가 되지 않도록 울고 웃어봐

다 끝마치고 싶은데 어떤 노래를 틀어야 할까

눈송이를 간직하고 싶어서 나무를 들였지

길을 걷다가 먹고 자다가 언뜻 들리는 다정한 목소리와 움푹 패인 상처가 난 자리로 내려앉는 눈보라

양쪽을 번갈아 밟고 가야지

 

 

 

 

비금속 소년

 

 여름이 소년의 꿈을 꾸는 중에는 풀벌레 소리가 들리곤 했다 우리는 장작을 쌓으며 여름과 함께 증발하는 것들에 대해 생각했다

 

 화산은 시력을 다한 신의 빈 눈동자 깜박이면 죽은 그림자가 흘러나와 눈먼 동물들의 밤이 되었다 스스로 알곤통이 된 소년, 꿈이 아니었으면 싶어 흐늘거리는 뼈를 만지며 줄기였으면 싶어 물의 텅 빈 눈을 들여다보았다 멀리,

 

 숲이 호수로 걸어가고 있다 버드나무가 물의 눈동자를 찌르고 있다 지워진 얼굴 위로 돋아나는 여름, 신은 태양의 가면을 쓰고 용접을 했다 소년이 나의 꿈속으로 들어와 팔을 휘두르면

 

 나는 나무에 가만히 기댄 채 넝쿨과 담장과 벌레를 그렸다 소년은 내가 그린 것에 명암을 넣었다 거대한 어둠이 필요해 우리는 불을 쬐면서 서로의 그림자를 바꿔 입었다 달궈진 돌을 쥐고 순례를 결심하곤 했다

 

 소년은 그림자를 돌에 가둬놓고 잠에서 깨어나지 않는다 나의 무릎에 이어진 소년, 이음새를 교환할 때마다 새소리를 냈다

 

 

 

 

번식

 

 

미나리가 자라면

미나리를 캐러가자 칼을 쥐고

휘두르는 기분이 좋다

 

언젠가는 쓸모가 있을 거야

 

행주를 삶으며

따듯한 냄새를

모두 놓쳐버렸다

 

물의 폭력이란 그런 것이구나

 

소파에 누워 창밖을 본다

어김없는 봄은

어떤 기분으로 걸어갈까

 

구름이 자신의 그림자에

물을 붓듯

발등이 부풀고

 

차분히

자라는 것

 

염소는 발굽에 걸린 풀을

골라내며 울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