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시 ‘홍시율시인’



홍시율시인의 詩 한강 둥치에서 외 4편

 

홍시율시인의 약력

 

1966년 경기도 안성출생 

금오공대 기계공학과 졸업

2016문학의 봄신인상을 통해 등단

시집으로사람이 별이다(2016),

사랑이 지나갔으므로 할 일이 많아졌다(2018),

아무 쓸모 없는 가슴(2022)

산문집은삶의 관성들 다시 읽기(2017),

잃어버린 고양이에 대한 예의(문학나눔2019),

나를 안아줄 시간이다(2021)등이 있다.

 

 

 

한강 둔치에서

 

모든 삶은 서로 만나는 곳에서

이루어지고 부서진다

새로워지자고 서둘렀던 이별도

잊고 지내자고 몸서리쳤던 망각도

되돌아보지 않을 용기 없음 탓이 아니라

한 번뿐인 삶이 서툴렀기 때문이다 

모든 사연들은 서로 만나는 곳에서

생겨나고 사라지는데

물결로 부딪쳐 말 할 수 없는

모래들의 대화가

그친 지가 오래된 둔치

쓰라리고 시린 기억들을

토해내도 되는 곳에서

강물은 강물대로

흐르다가 멈출 줄을 모른다

잠깐 잠깐 제 흘러온 내력을

이야기하지 못 한다

 

 

 

웃음과 울음

 

울지 말라고 때리지 마라

너는 웃으라고 때리면 웃어지더냐

너도 언젠가 울고 싶던 순간에

누군가의 등불 같던 웃음으로

구원되지 않았던가

네가 아픔을 느끼는 것은

공감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공감하더라도 외면해야 하는

비극에서 온다

웃음은

고립을 헤쳐 나온 경험을

필요로 한다

혼자 웃으면 외롭고

같이 웃으면 행복한 이유가 있겠지

누군가를 안아줄 수 있으려면

자기를 먼저

안아줄 수 있어야 하는 건

울음과 웃음이 훗날 서로

힘겹게 만나야 하기 때문이다

 

 

 

듣지 못하는 나무들의 천국

 

깊은 숲속에 자기 복제된 나무들이

우르르 떼를 지어서

주입된 말만을 옮기고 있을 때

그 숲에 오솔길을 만들고 싶었으나

문득 깨달았다 

감시시대의 후유증이

앞으로도 오래 갈 거라는 걸

나는 되돌아가서 나무들 밑에

키 작은 꽃씨들을 뿌렸다

말들이 잠시 다양해지기 시작했을 때

그들은 불행해져서 쉴 새 없이 웅성거렸다 

나는 칼을 든 허수아비 하나를 만들어

그들의 영웅으로 치켜세우고는

산을 총총히 걸어 내려왔다

우두머리들이 그 영웅을 앞세워

나머지 나무들의 고혈을

짜낼 거라는 걸 알아도

고통스런 진실을 얘기해 줄 수 없었다

그들은 행복해져서

이미 듣는 방법을 잊었으므로

 

 

 

구절초

 

내년을 기약할 수 있는 꽃은 없다

모든 꽃들이 저마다의 속삭임으로 전해지지만

내가 사랑한 꽃이 언제나 마지막 꽃이다

해가 저물고 날이 어두워지면서

날마다 하던 저녁 인사도

오늘 내가 그리워한 꽃들의

다른 향기를 배웅하는 일이다

오늘의 수고와 내일의 기약이 어우러져

매일을 다시 사는 힘이 될 것이다

시련이 오늘의 것만이 아니라면

내일 해야 할 일들 덜 수고롭도록

미리 준비한 사랑이 꿋꿋해야 한다

씨앗이 영그는 만큼 인생은 짧아간다

비록 내년의 꽃이 변하더라도

사랑을 머금은 꽃이 더 단단하고

화려해지는 것뿐이니

지난 시간과의 결별에 익숙해져야 한다

그 사랑이 영원할 것이라고 해도

내년의 꽃을 다시 사랑하게 되더라도

생의 씨앗이 되지 못한

여린 강박들을 토닥이면서

오늘 그 사랑을 완성시켜야 하리라

 

 

 

실종

 

어둠은 늘 오래된 바람을 몰고 다녔다

한 장의 철판 사이로 낮과 밤이 바뀌고

촉수로 더듬는 익숙한 낙탄은 둔탁한 소리를 내었다

정작 낯선 것은 제때 오지 않는 힐책들

아무리 벗겨내어도 알맹이가 없는 시간들이

근육의 피로들을 집어삼켰다

혹등아귀의 미끼 같은 활활 타오르는 화구는

다가갈 때마다 으르렁대고

등 뒤에서는 노련한 어둠이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문 안으로 들어오기를 애썼으므로

섣불리 문밖으로 나서지 못했다

어둠의 무서움은 화구가 지켜주었고

화구의 뜨거움은 어둠이 버텨주었으므로

그는 늘 경계 속에서야 숨을 쉴 수 있었다

어느 날 문의 안과 밖 사이에 놓여있던

길고 긴 절망들의 틈새로 그가 사라졌다

뜨거움과 어둠 사이로 그가 실종되었을 때

그 좁은 레일을 어떻게 통과했는지

사람들을 도대체 알지 못했다

물티슈와 컵라면, 탄가루가 묻은

수첩은 그곳을 통과할 수 없었으므로

어둠 속에 고스란히 남겨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