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시 ‘이선정시인’

이선정시인의 詩 이름값 외 4편

 

이선정 시인 약력

 

강원도 동해 출생

2016문학광장등단

시에세이집 나비시집 치킨의 마지막 설법, 고래, 52

2020년 강원문화재단 창작기금 수혜

중앙대학교 일반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석사과정 수료

계간 동안편집위원

 

 

이름값

 

창비라서 용서된다

실천문학, 문학동네, 문학과 지성

그 이름이라 다시 본다

 

껍데기에 손톱만큼 붙은 명찰

개쑥같이 시를 써도 찰떡같이 문학성인가?

다시 살펴봐도 개쑥이면 내 눈이 상한 것

 

쓴 사람 이름을 그 이름 하나가 덮는

참으로 기이한 이름

 

그거 하나 붙이자고

5년째 문턱에 줄 서있는 S

몇 개의 자잘한 상장 거머쥐고

10년째 달리고 있는 N

 

그리고 D, H, K.......

무수한 점들의 몸부림

 

 

 

족보의 진화

 

 아마 칠삭둥이였지, 멋모르던 시절 뭘 모르고 넙죽 태어난 집, 삼류라는 족보는 꼬리표처럼 따라다니고, 삼대 구 년 만에 어쩌다 낳은 빛나는 아이도 똑같은 삼류로 취급받고, 족보를 숨기고 족보를 포장하고 족보를 목 조르고, 급기야 족보를 떼어내 버리자고 10년의 이력을 파묻은 채 쓰윽 입 닦는 폐륜, 누구는 하늘같던 스승의 이름도 때가 되면 갈아치운다지? 반짝 하얀 이를 드러내며 가슴 부푼 새 꼬리표

 

, 그럼 이제 맘껏 훨훨 날아보렴

 

 

 

미래파? 아니, 미래형

  ―시는 경험의 산물인가 상상의 산물인가*

 

알고리즘 풀가동!

내게 특별한 외래어를 데려다줘요

엔터Enter,

아무도 쓰지 않은 독특한 것이어야 해요

엔터Enter,

 

화려한 아카이브가

얄팍한 지식으로 춤을 춰요

 

나는 그곳을 한 번도 못 가 봤는데

까짓것 상상을 조금 주입하면 뚝딱 시가 되지요

 

두 다리를 자르고 가슴과 손바닥이 온기를 잃어도

AI는 얼마나 친절하게요

 

어이 거기, 부딪히고 깨지고

삶을 죽도록 파헤치며 인간을 쓰는 시인님

어차피 AI가 대세랍니다

 

간단해요, 궁둥이는 딱 무겁게,

신선하고 다양한 소재를 찾아

열심히 엔터Enter만 누르시면 됩니다

새로운 방식입니다

 

미래형입니다

 

*워즈워드와 릴케, 가스통 바슐라르를 생각하다.

 

 

 

 

미슐랭의 시인들

 

 씹을수록 구토가 나, 대체 뭐가 문제지? 분명 기존의 레시피대로 고급 진 재료에 특이한 향신료를 썼거든, 이집 저집 얻어온 싱싱한 수사도 듬뿍 뿌렸어, 다행히 색다름에 중독된 몇은 맛을 몰라도 맛있다고 해, 독한 향에 길들여진 혀를 가져야 하거든, 진정한 미식가는 실종 되었어, 아니, 그들의 서식처는 변두리, 실상 정체가 요리사인 변종 미식가들이 세운 고급 진 레스토랑에 입장할 회원권이 없지, 콜로세움 같은 레스토랑에서는 솔직한 혓바닥을 숨긴 요리사들이 화려하게 토핑 된 음식에 손뼉을 치며 매일 서로의 요리를 칭찬해, 변두리 미식가들을 철저히 외면한 채 줄줄이 코스로 나오는 새로움을 가장한 비슷한 요리를 씹지

 

의도를 묻는 건 실례야

굳이 찾자면, 아니야! 요리 안에는 없어

혹시 그것을 담은 접시에 숨겼을지도 몰라

접시의 갈비뼈까지 깊숙이 손을 넣어봐

 

웃는 낯빛으로 서로를 탐색하며, 좀 더 특이한 향신료를 교환하며, 꾸역꾸역 구토를 즐기며

 

 

 

고래, 52*

 

고래가 이해되기 시작한 건 슬픈 일이야

쓰고 또 쓰고

지우고 쓰고

또 쓰고 지우고

 

바다는 무한해

무한하다는 말은 왜 슬프지?

용솟음치든 꼬물거리든 자빠지든 무릎이 깨지든

어찌하든, 쓴다

 

대왕고래 청고래 향고래 범고래 흑부리고래

브라이드고래 아르누부리고래 피그미부리고래

허브부리고래 부리고래부리고래

 

꿈틀거린다, 휘젓는다, 내달린다, 난다, 움츠린다,

기진맥진한다, 베인다, 잠수한다, 숨통이 조인다,

베인다, 바다에 베인다, 놓지 못한다, 그냥 베인다,

 

고래가 점점 사라지는 건 바다가 무한하기 때문이야

무한한 바다의 갈퀴에 질식당하기 때문

 

어느 구멍이든 파보면

오래전 사라졌던 눈이 퀭한 고래가 

부리고래부리고래 자신을 벤 바다를 꿰매고 있을 거야

 

고래가 닿지 못하는 소리 저 너머의 바다, 가장 신선하고 난해한 바다를 입에 문

슬픈 52Hz를 꿈꾸며

 

*정일근 시인의 시 <고래, 52>가 있다. 52Hz로 홀로 노래하는 고래, 보통 고래의 주파수가 15~20Hz이기에 다른 고래들과 소통하지 못하는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고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