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시 ' 염민숙시인'


염민숙시인의 詩 서쪽 외 4편


염민숙시인 약력

 

약력 1960년 전남 장흥 출생.

2015년 머니투데이 신춘문예 등단. 

시집 시라시.

새얼문학. 해시. 인시협 동인

 

 

 

서쪽

 하늘에는 세상 떠난 새들이 가는 동산이 있다. 평생 빚은 끈을 동산에 매려고 새는 날개를 벗어놓고 훌쩍 날아간다.  

 해 질 녘은 둥지에 매단 끈들이 휘날려 꽃동산이 된다. 입술을 물었던 기억이 핏방울 꽃으로 피어나, 서쪽은 꽃물결로 일렁인다.

 새들의 일은 끈을 풀고 맺는 일. 질긴 인연을 붙들고 살아내는 일. 엉클어진 사이에는 피를 발라야 가닥이 잡힌다. 발톱에 쪼개진 실마리는 깃에 품어야 다시 잇게 된다.

 입술 문 기억이 없으면 꽃물결 따라 일렁일 수 없다고 한다. 희미한 끈을 들고 둥지를 찾아 헤맨다고 한다.

 

 

 

낙지 굴

 

암호로 쓴 딸의 일기장을 읽었다

탈화하고 남은 매미 허물같이

본 모양이 추상화된 글자다

땅에 따라 달라지는 낙타 발자국이다

해독할 수 없는 기밀문서다

 

아이 마음은 갯벌 낙지부럿처럼 굴이 깊다

다가가면 이미 다른 데로 길을 팠다

팔을 뻗어도 장막까지 닿지 않았다

가만히 있으면 온기를 따라 손을 뻗어오기도 했다

 

갈라지는 입술에 아이의 메마른 속을

미소를 띠면 따스함이 고이는 구나

눈이 반짝이면 길이 트이는 줄 알아들었다

 

문 닫고 침대 아래에 지부를 둔

외계와의 교신 끝에 딸은 제 행성으로 떠났다

멜로디언 스타킹 앨범 크리스마스카드 일기장은

거주지 기념물로 남기고 갔다

 

암호 해독 키처럼 딸의 딸이 왔다

 

 

 

아침

 

어느 먼 동쪽 동굴에서

몇몇 대장장이가

얇게 펴 세상에 밀어내고 있다

 

어둠 둥지에서 아침 한 알을 꺼내다가

커다란 모루 위에 올려놓고

벼리는 사람들이 망치로 두드리면 아침은 온다

두툼한 판이 은박보다 박사箔絲보다 얇아져

세상에 붙는 거다

지극한 어둠은 빛을 낳는 먹이가 된다

어둠을 먹고 나온 아침은 차갑다

부서트리지 않게 펴는 것은

나무망치를 든 대장장이의 일

망치로 어르고 달래어 온기를 입힌다

동굴에는 약초 묶음이 걸려 있고

바닥에는 색이 우러난 항아리가 놓여 있다

이마를 동여맨 대장장이가 두드리던 아침을

지초芝草 항아리에 담그면

홍주같이 붉은 아침이 되고

쪽물 항아리에 담그면

청심淸心한 아침이 되는 거다

얇게 더 얇게 펴진 아침은

지저귀는 새들 부리에  

오므린 나팔꽃 위에 붙어 방긋 피어난다

 

 

 

비탈 좋아하세요?

 비탈에 서서 돌아보니 보여요. 염소들 데리고 한해살이풀로 살다 보니 단단하던 뿔이 빠지더라고요.

 

 가파른 피를 가진 족속이에요. 높은 데 서려는 고집인 거죠. 앙버티고 있으면 강퍅하다고 하지만 시류에 끌려가지 않는 발굽이 있으니까요.

 

 흑염소는 위엣 걸 먹어요. 고개 쳐들고 발까지 들면서 아까시잎을 버들잎을 잘 잘 따 먹어요. 뽕잎이면 뽕잎, 칡넝쿨이면 칡넝쿨, 남다른 먹성이 흑염소를 흑염소답게 하는 거죠.

 

 염소들과 비탈에 있으면 목숨의 한살이가 보여요. 나고 자라 먹히고 사라지는 내가 보여요.

 

 

 

가슴이 얼면 춥지 않다

 

밤새 저수지가 얼어 마을 앞이 환하다

뒤란 감나무 홍시가 얼어 지붕이 환하다

까치가 왔다 가도록

대숲은 서리에 묶여 잠잠하다

 

골바람 정류장에 소년이 서 있다

청바지에 셔츠만 입은 아이 얼굴이 파랗다

소름 끼친 목도 파랗고 발목도 파랗다

언 귓가에 일어선 솜털이 해당화 가시 같다

끊임없는 기다림이 바작바작 애를 태워

몸이 얼어도 옷을 껴입을 수 없다

 

얼음장 아래서 봄을 기다리는 물고기도

가슴에 끄지 못한 불을 품고 있으려나  

얼음집 안에서 포근한 웃음을 나누며

귓속말같이 황홀하게 솟구치는 꿈을 꾸려나?

 

버스를 타고 골짜기 너머 여행을 다녀오면

데려가지 않는 부모가 남처럼 멀어지고

가슴 지져대는 불길이 사위어서

봄볕 가득한 옷을 입을 수 있을 거다

아지랑이 엮어 짠 목도리를 두를 수 있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