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시 ‘최영옥시인’


최영옥시인의 詩 줄을 타다 외 4편

최영옥시인 약력

서울 출생

강원문학신인문학상, 강원여성문예경연대회 장원

박건호시낭송대회 금상 외 다수

2020년 강원문화재단 창작지원금 수혜

시 집: 고요의 뒤꿈치를 깨물다 

 

 

 

줄을 타다

 

사상 유례없는 폭염 속

이글거리는 뙤약볕 아래

줄 하나에 매달려

고압 세척하는 남자

거센 물줄기에 중심 잃고

휘청거릴 때도 있지만

바람벽에 기대어

사뿐사뿐 곡예 하듯

아파트 난간 사이 비집고

해묵은 먼지를 씻어낸다

줄을 잘 잡아야 남보다

빨리 올라간다는데

하늘에선 썩은 동아줄조차

내려올 기미 없고

퀴퀴하게 절은 땀냄새

바람 한 줄기로 씻어내며

땅에서 올라간 견고한 밥줄

다시 꽉 움켜잡는 남자

벼랑 끝에 선 심정으로

허공 딛고

거미처럼 아슬아슬 줄을 탄다

묵언의 발자국 층층마다

지나간 자리

얼룩진 시간 말갛게 지워지면

오랫동안 부옇게 갇혔다

되살아나는 풍경들

하나 둘, 줄을 타고

걸어 나온다

 

 

 

들의 숲에 들다

 

당숲*이 빗장을 엽니다

 

서낭당 금줄 늑골 사이에 하도롱빛 소원 하나 접어 두고 오솔길을 따라 오릅니다

 

바람이 오는 방향에서 흘러나오는 복자기나무 초록 숨결이 오래된 숲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오래전 세웠던 나라와, 오래전 살았던 사람들과, 오래전 사라진 사랑 이야기가 청록빛으로 풀풀풀 풀려나오자 새들이 푸릇푸릇 날아오릅니다

 

아마도 오래된 영혼들이 숲속을 떠돌다 떠돌다 파랑새 되어 터를 잡고 사는 것 같습니다

 

피안의 세계를 넘나드는 새들은 정말로 천상의 행복 누리고 있을까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신갈나무 널찍한 이파리를 펴서 들여다봅니다

 

자동차도 없던 시절, 얼마나 많은 푸른 잎들이 짚신에 몸 누이고 적멸에 들었을까 생각하다가 넉살 좋은 사위질빵 상앗빛 너스레에 그만 웃음을 터뜨립니다

 

, , , 당숲이 벌써 빗장 걸 시각을 알립니다

 

이제 곤비한 영혼들이 사는 마을로 되돌아가기로 합니다

 

헌데, 숲을 벗어나는 길이 낯설게 느껴지는 건 왜일까요?

 

마음이 멈칫거리며 자꾸만 뒤를 돌아다봅니다

*강원도 원주시 신림면 성황림(천연기념물 제93).

 

 

목련꽃 아래서

 

그대 흰 그림자 안고

소리 없이 스미고 싶었네

 

구름이 하늘에 스미듯

노을이 바다에 스미듯

 

시름 다 버리고

부귀영화 다 버리고

 

그대 품에 고이고이

날개를 접은 채

 

그 향기에 스며들어

오래오래 머물고 싶었네

 

맑은 영혼이 빚은 이슬

한 방울로 목 축이고

 

세상 모든 기쁨 다 가진 듯

세상 모든 행복 다 가진 듯

 

 

그대 떠나가기 전,

 

깊이깊이

꽃잠 속에 빠져들고 싶었네

 

 

고귀한 선물

 

풀잎이라 부르리

흰 파도라 부르리

사람들은 날마다 왁자한 꽃잔치를 벌이지만

꽃그림자 늘 낮은 곳으로 그늘을 드리워

서러운 가슴 더욱더 서러워지는데

풀잎이여, 노래를 불러다오

시들지 않을 풋풋한 풀빛 노래를

흰 파도여, 노래를 불러다오

마르지 않을 청청淸淸한 물빛 노래를

 

내 안에 여울져 흐르는 빛이여!

저 멀리서 외로이 깜박이는 별이여!

그대를 생각하면 가슴이 저며오는데

나 이제 사랑이라 부르리

나 이제 생명이라 부르리

 

신이 주신 가장 큰 선물, 그대라는 고귀한 선물

  

 

 

노회신 무덤벽화* 살아나다

 

투명한 바람 한 줄기

시간을 거슬러

충정공 노회신 무덤벽화 안을 들여다본다

 

깜깜한 지하에서 수백 년 동안 잠들어 있던

석실 벽면의 사신들,

금당 송기성 화백의 청고한 붓끝에서

하나 둘 눈을 뜬다

 

동쪽에서는 청룡, 서쪽에서는 백호

남쪽에서는 주작, 북쪽에서는 현무

녹이 슨 묘의 문을 밀고 조심조심

걸어 나온다

 

고구려 고분벽화의 엄숙한 겉옷 벗어버리고

익살스러운 옷으로 가볍게 갈아입고

있으면서도 없는, 역사의 비밀을 간직한 채

알면서도 모르는 척 시치미 떼고

어둑한 성곽 안 꼭꼭 갇혀 있다

지상으로 나와 환생하는 순간, 번쩍

푸른 섬광 한 획을 긋는다

 

무덤 밖 세상에서 민화로 되살아난 그림들,

우렁우렁 새바람을 몰고 온다

 

*2009년 원주-강릉 복선전철 공사 중 문막읍 동화리에서 발견된 충정공 노회신 무덤벽화. 조선 초기의 것으로 금당 송기성 화백이 민화 기법으로 재현해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