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시 '김네잎시인'


김네잎시인의 詩 π로 향하는 무한수열 외 4편

김네잎시인의 약력

2016 영주일보 신춘문예 등단

시집 우리는 남남이 되자고 포옹을 했다.

 

 

π로 향하는 무한수열*

 

돌진했다 너는 빛조차 벗어날 수 없는 그곳으로

부피를 버리고 소실점을 껴안는다

 

탁자 위에 사과가 놓여있다

웜홀이 중심을 관통한

분명 넌 이곳을 지나고 있을 거다

 

사과를 창가로 옮긴다

기다리는 사람처럼

 

창에 기댄 채 어깨의 곡선이 허물어 질 때

내가 내내 옆 표정만 보고 있을 때

우리의 기연(奇緣)을 타고 흘러내리던 적막한 공백

 

공백에 깃든 별리

네가 끝내 빨려들어 간 블랙홀

 

뒤돌아서자마자 내 발이 지워지기 시작한다

 

이 방이 이렇게 넓었었나

너의 빈자리를 건너갈 수 없다

* 라마누잔의 수학 이론 블랙홀, 양자이론, 끈이론 등의 연구에 응용된다.

 

 

이어지는 패키지

 

첫 목적지는 멀고 멀었다

낮인지 밤인지 분간할 수 없었고

투어버스는 번번이 툴툴거렸다

경적 소리에 뒤를 돌아보면 아무도 없다

분명 오래전에 순례자들은 잠들었는데

성지와 유적지의 차이는 알 수 없고

그들의 태도와 의지는 다 어디로 갔을까

누군가 문을 쾅쾅 두드린다

문을 열었다 손목은 보이지 않고

CCTV같은 눈동자만 있다

무엇을 끝까지 목격하려는 걸까

운전석에선 핸들을 휘감은 물뱀 히드라가

아홉 개의 머리를 들어 갑자기 나를 바라본다

비명을 지르려고 입을 벌렸는데

이국의 언어가 쏟아진다

라디오에선 클로징 멘트가 흘러나온다

아마존 노란점거북이의 눈물에서

나트륨을 섭취하는 나비의 사연과

거북이의 눈 가장자리에 앉을 때마다

팔랑거리는 나비의 느린 슬픔을 아느냐고 묻는다

내가 훌쩍훌쩍 운다

창문 옆에선 여행자란 여행자는 전부 살아나서

자신의 관을 메고 나를 본다

빛이 모두 새나간 버스 안은 죽음처럼 어둡다

가도 가도 음울한 장면들

문득 버스가 요람으로 변해 있다

 

 

 

배터리 케이지*

 

이곳은

A4 용지 2/3 크기죠

 

야성이 비집고 들어올 틈도

안락을 온전히 품을 수도 없이

 

오늘을 살아요

 

여기는 잠속이 좁고 어두워

어항 속 물고기가 되는 꿈을 꾸죠

슬픈 날개와 지느러미

다시 갇히는 세계와 멀어지는 방향

 

죽음을 탐색해도 될까요

동족의 날개 밑 온기를 쪼아도 될까요

 

의심 없이

반성 없이

 

본능은

가끔 깨집니다

 

모성이 우글댑니다

 

달이 차지 않아도 무럭무럭 태어나는

무정한 것들은

어디로 굴러가서 바깥이 되나요?

 

아무도 모르게

내가 독백을 숨겨놓았는데

* 달걀 생산 방식 중 하나로 좁은 공간 안에 닭 6~8 마리를 집어넣는 구조물

 

 

 

스프링클러

 

너에게 소환된 나는, 그러나 꿈 밖에서 기다리는 사람이 된다

흉몽 위에 집이 하나 세워진다

먼 곳에서 폭풍우가 다가오고 있다 창문은 이미 깨져 버렸으니

 

한쪽으로 쏠리는 감정은 위험하다

천천히 발병하는 식은땀

 

마지막 호흡을 수습할 사람이 되기 싫어 꿈에 매몰된 너를 흔들어 깨운다

 

달아났던 이웃들이 돌아오고 있다 축축한 얼굴로

 

지난밤 누군가 울어도 괜찮다고 말해줬더라면 네 옆에서 그들은 수다를 떨었을 텐데, 걱정하는 척을 한다

 

헤집을수록 고이는 검정, 헤집을수록 깊어지는 어둠을

 

그런데 네 잠은 왜 이렇게 긴 거니?

 

 

 

싱잉볼(singing bowl)

 

간밤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요 이 거짓말은

따뜻한 이웃에게로 번집니다

 

비가 내리고

 

소리도 자국을 남기죠

 

그 사람은 나조차 들은 적 없는 내 목소리를 찾아 잠 속까지 뒤져요

집요하게

 

열려 있는

무수히 많은 문을 열다가 누군가 떨어질 줄 모르고,

 

쉽게 깨지죠

 

그때마다 구석구석 쓸어 담지만

늘 뭔가 하나씩 잃어버려요

 

나는 파열 말고 떨림만을 사랑하는데

그럴듯한 꽃무늬 접시처럼 부활하죠

 

거짓말을 모르는 것처럼

지겹게 비는 계속되고

 

비를 벗어난 빗방울처럼

저 문을 박차고 나서는 마음이 있습니다

 

몸은 마음 없이 남겨졌습니다

 

눈을 감으세요, 누군가 말해서

나는 드디어 울기 시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