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시 ‘이담하시인’

이담하시인의 詩 빨래 외 4편

이담하 시인 약력

 

2011년 시사사 등단.

2016년 한라일보 시부문 당선.

시집 다음 달부터 웃을 수 있어요2020년 문학나눔 도서 에 선정됨.

 

빨래

 

손과 발을 떼어 놓고 한 통 속에서 돌았던 토르소들

막 섞여도 근친이 아니어서 비난받을 수 없는 옷

 

입고 있다가 젖으면 다 빨래다

 

스스로 물살의 시간을 견뎌 온 빨래

뼈가 없어서 쉽게 구겨질 뿐, 마르지 않는 빨래는 없다

마르면서 줄어드는 품보다 기장,

작년에 입었던 옷이 감쪽같이 줄어드는

빨래의 연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개발이 덜 된 지역에서는 아직도 빨래를 개 패듯이 팬다

투쟁과 저항이 방망이질에서 유래됐다는 설은

덜 마른 빨래를 두드리는 눅눅한 고백으로

아이 셋 낳을 때까지 주면 안 되는 날개옷도

 

입고 있다가 살만 빼면 다 빨래다

 

 

 

한철 내내 굴러다니는 지구

 

지구의 측면을 두드리면

텅텅거리는 응답을 보내온다

 

역적도 아니면서 온몸으로 칼을 받아

한 번에 쩍,

잘 익은 여름이 반으로 갈라지는 수박 시대

여름은 약속을 지켰다

 

한철 내내 굴러다니는 지구

칼끝에서 벌어지는 지구의 단면을 보면

까만 소혹성들이

숨은 그림으로 박혀 있는 만월을 잘라

조각달로 건네는 여름밤

손끝에 뜨는 적월(赤月)을 들고

퉤퉤 까만 밤을 골라 뱉는 여름엔

누구의 입에서건 중력이 생긴다

 

칼끝에서 지심을 보는 계절

얼룩무늬 지구가 팽창한다

천문학적 비율로 축소된 닮은꼴인

갈라진 수박 속에는

지구공동설 같은 붉은 의견과

덜 익은 의견이 하나둘 들어 있는

지구와 비슷한 수박의 적도

지구의 보호색 같은 색깔이

사람 몸에서 희석되는 여름 저녁

 

 

기다리는 시간만큼

 

성별도 국적도 따지지 않고

자리를 내어 주는 민간 기구 같은 의자들

첫차와 막차 시간을 기억한다

 

서성거림은 어느 순간을 찾아가는 불규칙한 착석

처음 앉는 사람에겐 차갑지만

비스듬한 등받이의 배려로 앉아서도 바쁜 의자

마중과 배웅만 쏙 빼내면

다시 빈자리가 되기 위해 삐걱거리며 낡아 간다

 

마중과 배웅 사이로

허겁지겁 달려오는 시간들 지루한 연착들

모든 시간은 정해진 약속을 향해 달리고

약속을 넘어서면서부터

연착으로 놓친 차편 사이에 의자가 있다

 

기다리는 시간만큼 앉아 있어도 되는 의자

기다리는 것은 수행과 같아서

화장실도 안 가고 앉아 있는 의자

사람을 닮았으면서 사람이 아닌 사람

옮기려고 잡아끌면

소리로 저항하는 무정부주의자들

 

 

임관林冠의 숲

 

내셔널 지오그래픽 표지의 하이페리온* 우듬지는

중력이 빠져 나가는 다른 외계, 다른 도시

목이 아픈 것으로 길이를 재는 높이마다

수시로 반짝거리는 수관

점박이올빼미와 알락쇠오리를 안개로 기르는 갈수기에

말을 하고 싶을 때는 새를 시켜서 하거나

키를 늘이는 습성으로

우듬지에서 뿌리까지

몇 번의 빙하기와 화마가 덮친 날,

무사히 빠져 나온 날과 공룡이 사라진 무서운 날은

수직으로 크는 심재 속에

옹크린 나이바퀴는 나무의 기억으로

가지마다 반짝거리는 임관의 숲

조심성 없는 바람이 스쳐

영혼의 층과 목질의 층에서

거주자들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하이페리온 우듬지

안개선단이 들려 가는 임관의 숲이다

 

*하이페리온 Hyperion : 미국 캘리포니아 레드우드 국립공원의 아메리카삼나무. 높이 115.54m, 나이 600살 이상 추정. 세계에서 가장 키가 큰 나무.

 

 

새들의 오선보

 

 64분 쉼표를 닮은 전신주의 고압선 칸보다 줄을 잡고 음표 그리기에 여념이 없는 새들의 부리 서식지마다 다르게 그리는 음자리표와 박자표대로 줄과 칸에서 떼를 지어 노래를 부른다

 

 음계의 층위를 밟고 있는 새들 옮겨 앉을 적마다 반음 올리고 반음 내려서 어떤 음은 세게, 어떤 음은 여리게 음의 낙하를 방지하기 위해 바람과 협업으로 돌림노래를 부를 때 맹금류의 울음소리로 간밤의 불길한 꿈을 흩뿌리며 스타카토 주법으로 날아올라 무음만 걸린 악보는 공중에서 출렁거린다

 

 어디쯤 불안을 떨어드리고 도돌이표를 따라와 마디로 앉은 새들 바람만 따라 부를 수 있는 새들의 악보 만들기에 여념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