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시 '강성남시인'

강성남 시인의 詩 햇살을 닦다 외 4편

강성남 시인 약력

67년 경북 안동 출생.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2009년 농민신문 신춘문예 등단.

2018년 제26회 전태일문학상 수상.

 

 

햇살을 닦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을 닦는다

 

책들 사이에

뽀얀 햇빛이 앉아 있다

 

늘 닦아내건만

다시 기쁨처럼

곁에 와 앉는 너

 

살아간다는 건

마음을 닦는 일일까

 

닦아낸 창틀에 내 얼굴이 또 쌓이고 있다

 

 

 

땅끝에서 온 조약돌

 

당신은 왜 혼자 거기까지 가야 했을까

그곳까지 가야 답이 나올 문제라도 있었을까

우리는 저마다 땅끝으로 가는 이유가 다를 것이므로

나는 묻지 않기로 한다

 

사람들 모두 다른 사연을 안고 찾아간다는 땅끝 해변

그의 심장을 드나드는 파도소리가 나를 적신다

파도가 키운 바다의 근육질에 얼굴을 묻고

그 동백숲에서 한 며칠 살았으면 좋겠다

 

당신은 지금 물위에 떠있는 섬이 되어 뭍을 보고 있을까

상처에 새살 차오르는 소리라도 듣고 있을까

 

돌 하나에 마음 하나,

마음 위에 또 한 마음을 포개며

하늘에 소원이라도 빌고 있을까

 

한 가슴이 한 가슴을 품어주듯

내 아픈 손가락도 쓰다듬어 보았을까

 

파도와 햇빛과 물결이 낳은 저 돌의 아기들

바닷물이 집이고 침대이고 요람이다

 

저 둥근 얼굴 속에 우연이라는 필연이 숨어 있다

바구니에 담겨 물살에 떠밀려온 아기모세처럼

 

사랑이 시작된 해원(海園) 한가운데 당신이 있다

 


 

달과 고양이

 

  외로움은 가슴에 엄마를 한 마리씩 키운다 나만의 엄마를 그리다가 발견한 그녀 가슴이 얼마나 예쁜지 바라만 봐도 배가 부르다 사랑 나누는 법을 아는 그녀 품에 녀석이 있다 녀석은 그녀가 길에서 주워온 애인이다 놈의 재롱과 웃음이 그녀를 차지했다 점점 풀리는 눈꼬리가 수상하다 달의 유두에 물기가 돈다 밤하늘에 별이 총총히 박힌다 야~~ 눈을 떠 눈을 뜨라고! 여름밤은 꽃향기로 가득하고 내 잠은 그새 밖으로 나갔다 왔던가? 복도 창문이 덜커덩 뒤척인다 당신은 무슨 이유로 이곳까지 올라와 내 잠을 깨우는지 달빛으로 몸을 감은 그림자 내가 누우면 눕고 일어서면 같이 일어서는 나보다 더 나 같은 당신 장미는 붉은 길로 오고 등꽃은 보랏빛 길로 오는 밤 엄마가 아빠에게 우유를 만들어주는 일은 진실 나는 신선한 우유를 구별할 줄 안다 가장 두려운 건 사랑을 잃는 것, 우유를 빼앗기면 내 행복도 그만큼 맛이 달라질까 내가 한눈파는 사이 달과 고양이는 사랑을 나눠 먹는다 그녀의 우유 만들기 못 본 척하자니 속이 탄다 그러나 기다림은 헛되지 않는 법! 다시 돌아온 나의 파랑새 엄마 하나에 아빠가 둘이라고 세상이 무너질 것인가 아, 나는 반달무늬 달빛 도둑고양이!
 

*비가스 루나 감독의 '달과 꼭지' 변용함

 

 

임산부 배려석

 

  내일의 주인공을 맞이할 자리에 가죽잠바가 와서 앉는다 중국 교포가, 동남아에서 온 근로자가 앉는다 임산부는 좀체 오지 않고 구찌 핸드백을 든 하이힐이, 청바지가 앉는다 불투명한 미래에 주눅 든, 가난 때문에 아직 태어나지 못한 아기들이 전철 안을 서성인다 국가 존립의 위기가 마련한 임산부 배려석, 곧 아기가 될 노인들이 번갈아 앉는다 주인공이 앉아야 할 자리가 기능을 상실했다 명분만 앉아 자리를 양보한다 핑크빛 내일이 깔아 놓은 방석에, 슬픈 줄 모르는 오늘이 앉아 눈치 없이 떠들고 있다 좌석 뒤에 붙은 지하철 광고판, '미래를 준비하는 여학생만을 위한 보건특성화고'가 몇 줄의 말씀을 들고 나부낀다

 

-여러분을 맞이할 준비가 되었습니다.

-행복 박람회에 초대합니다.

-당신이 최고!

 

 

 

히비스커스

 

무궁화 꽃이 피었다

외갓집 장독대 앞에서, 학교 운동장에서

화사하게 웃던 꽃

국회의사당과 청와대 뜰을 오간다

 

단 하루만 피어도, 평생연금 보장된다는

무궁화는 왜 자꾸 피나

무엇을 위해 피나

 

캐나다 토론토 한인촌에 심었다는 샤론의 장미는

고국 그리운 이들 긍지와 애국심을 키운다지만

약자의 눈물 외면하는

무궁화는

어디에 쓰려고 피나

 

혈액순환에 좋다는 그 꽃

기름진 사람들 뱃속에 들어가

혈관청소나 하려고 피었나

 

욥의 동산 한가운데, 우뚝 선 십자가도

지켜주지 못한 광주의 아우슈비츠

國花 제단에 놓인 유골 항아리

아직 식지 않았다

 

배 안에 갇힌, 무구한 눈망울들

차디찬 물속에서 죽어갈 때

저 무궁화는 무얼 하고 있었나

 

신분증 놓고 왔다는 죄로

공원벤치에서 이유도 모르고 잡혀간 사람들

엄마 심부름 갔다가 벽 속에 갇힌 아홉 살 계집아이

비명소리 들어 보았는가

 

계엄군의 장총에 쫓기던 고라니와 토끼

총소리에 혼비백산하는 새들

팔은 팔대로, 다리는 다리대로

해부학교실로 팔려나간

불타는 해골들을 보았는가

 

뒤늦게 사과 한 바구니 건네주며

인공누액으로 눈물 흘리는 악어들

민낯을 보았는가

 

*무궁화의 속명. 하와이 무궁화라고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