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시 '문선정 시인'


문선정 시인의 詩 신전 가는 길 외 4편

문선정 시인 약력

 

경기 구리 출생. 2014시에로 등단

()한국작가회의회원.

<다층시문학회> <,작가들>활동.

 

 

신전 가는 길

 

신전이 되어버린 은행나무가 있다지

 

꼬깃한 주소를 들고 기차를 탄다

우러러도 모자랄 생을 감히 더듬기는 어려운 일이지만

한 발 짝도 다가서지 못한다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나무의 봄이었던 여름이었던 풍장 속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일천년 동안 써내려간 경전을 만나러 가는 길

 

바람이 흩어졌다 다시 모여드는 속도로 흔들리는 문장들이 경을 왼다고도 들었다

노랗게 불어오는 바람을 따먹고 노랗게 익어 천 년이라고도 들었다

내게 문을 열어줄 시간 앞에서 자세를 고치다가

정작 드는 길을 지나친다고도 들었다

 

얼마나 더 가야 경전에 닿을지

끝 간 데 없이 걷고 또 걸어야 닿을 듯

 

노랗게 발하는 주소를 들고 길을 걷는다

 

 

 

 

성모상에서 흘러내린 푸른 망토처럼

 

나는 삐뚤어집니다

얼마나 재미난 일인가요

삐딱하게 목을 꺾고 삐뚤빼뚤 걸어 다니며 낯설어지는,

우리 행복한 말다툼이었던 잠언 같은 푸른 말씀들을 던져버립니다

 

랄랄라, 오늘도 유쾌한 하루

 

나의 사색이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나의 성실한 기도는 어디로 가는지

이제 알고 싶지 않습니다.

 

어둠보다 더 두려운 오염된 나를 감싸고

나의 붉은 혓바닥은 저 혼자 키득거립니다

푸른 바다보다 더 깊고 넓다던 당신의 역사를 따라다니던 죽은 감정의 각오를 지붕 위로 던집니다

 

당신 혹시 보았나요?

 

내 몸집보다 훨씬 큰, 당신이 불쌍히 여겼던 깨진 그림자의 크기와 감정을,

지붕 위에 버려진 위태로운 내 울음의 크기와 감정을.

 

랄랄라, 나는 제대로 삐뚤어졌습니다

오직 당신에게 눈멀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슬기로운 겨울생활

 

단맛에 빠져 한 계절 탕진해야지

즐거움이 이뿐이라니 이렇게 달콤한 절망도 없다

 

쇠부엉이 울음소리 적막을 연주하는 후미진 곳에서

나는 즉흥적으로 흔들리지 않는다

충동적으로 쓸쓸하다고 애원하지 않는다

감이 익기를 기다리는 일도 명랑의 한 조각

고요의 분말을 한 줌씩 털어 넣으며 소리 없이 익어가는 감

추위가 얼었다 풀렸다 반복하는 동안

주홍빛 생살을 파먹고 붉어지는 나를 관찰해야지

 

어쩌다 덜 익은 감 한 입 물면

온 세상 떫은맛을 동원해 나를 몰아세우던 당신을 개입시켜

입 안 가득 채워지는 모래알 같은 말을 받아 적어야지

쌈닭처럼 달려들지도 못하고 벌어지고 다물어진 떫은 관계

저장된 이름을 삭제하듯 웅크린 곡절을 뱉어내야지

 

겨울은 길고 박스 속 남은 감도 충분하고

이런 다사로운 허기가 즐거움의 전부라니

해방이다

 

 

 

 

마그리뜨 풍으로 창문 만들기

 

긴 장마로 무연해진 몸의 뒤척임이 지루해지는 순간

르네 마그리뜨의 그림 같은 하늘이 창문에 걸렸다

마그리뜨씨는 지난 밤부터 사다리를 타고 올라

별을 그렸다가

푸른 덧칠을 한 뒤 구름을 그리고 내려왔으리라

마그리뜨씨의 그림에서 차르르 햇살이 내린다

나는 해의 냄새를 밟으면서

지루할 뻔 했던 하루를 데리고 가만가만 걷는다

이런 나를 내려다보는 그림이 술렁거리기 전에

날개를 편 새의 모양으로 하늘을 오려내어

내 가슴에 창문 하나 만들고 싶다

세상에 그려진 무수한 이정표의 끌림에도

오직 내게로 날아든 새는,

구부정한 나의 허리를 일으켜 세워 주리라

창문 옆에 커튼처럼 흩날리는 키 작은 나무 한 그루 심으면

휘어지려는 가슴을 콕, , ,

쪼아대도 성가시지 않는 새와

잎 그늘에 어리는 나무의 짙어지는 생과 구부정한 나의 생이

슬프거나 기쁘거나 한 울음을 터트리며 살아 갈 수 있겠다

 

 

 

 

배경

 

쌀을 씻고 있는데

울음이 다가 왔어

 

평형을 잃은 우리의 어떤 순간이 왈칵, 나를 덮쳤을까

 

정오에는 여름나무 아래서 커피 한 잔이 목구멍으로 흘러 들어왔고

문득 당신의 안부가 돋아나 하루의 절반을 헤엄쳐 다녔어

여섯 시의 언저리, 우울이 떠다니는 물가에 서서 쌀을 씻고 있어

 

정갈하지 못한 낱알 같은 뿌연 말들을 흘려보내고 있어

이렇게 분분히 당신 속으로 흘러들어 중얼거리는 나를

바라보네,

문득 약속도 없이 먼 거리를 달려온 당신의 맨얼굴인가 했네

 

해질녘 뾰족하게 솟구치는 울음의 발행처를 들고 서 있다가

눈물 몇 방울 밥물에 빠지는 걸 보고 눈을 감아버렸어

 

속눈썹은 슬픔이 부서져 내리기엔 가장 좋은 장소

 

뜨거운 눈물 냄새를 담아 소리의 재생기처럼 압력밥솥은 벌벌 몸을 떨고

이제 와 다시 밥물을 바꿀 수 없는 것처럼

때론 명쾌하지 않는 답이 아무 뜻 없이 앞장 서 걷듯이

울음이 다녀 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