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시 '김감우 시인'

엄나무 구유 외 9편

 

 

[이름] 김감우

[약력]
* 2016 <열린시학> 등단
*울산문협 회원. 봄시동인.
*시집 <바람을 만지며 놀다>

 

 

 

 

 

1.엄나무 구유

                                          김감우

오백 년 전에 태어나 
쌀 씻어 공양하는 그릇으로 살았다
석남사 대웅전 뒤 열반에 든 
엄나무 구유 팔상도 아래 누웠다
저녁강의 배를 닮았다
미루나무가 따박따박 제 박자를 
지켜가던 유년의 저물녘
강 저편은 언제나 맘먹으면 
풀쩍 뛰어 닿을 수 있을 듯 했다  
풍경 속에 시퍼런 소용돌이 있어
뱃사공 장단지에 푸른 정맥이 
툭툭 돋아났다 강 건너 저녁처럼 
팔상도 아래 날 다시 저무는 데
구유는 빈 몸에 낡은 나이테만 
차분히 싣고 항해 중이다
바닥에 물을 빼던 구멍 
제자리에 있으니 편안하게 
두렵지 않다는 듯 당당하게

 

 

2.굴무기낭*

                                          김감우

바다를 보아야겠다고, 가면 돌아오지 않겠다고, 손금에 칼금 깊이 그으며 지도를 만들며 나선 길, 저리 깊은 강 건널 줄 몰랐다 저리 높은 산 넘어야할 줄 몰랐다 가지 마라, 가지 마라고 산이 울부짖는 소리 파도를 밀어내고 바다를 밀어내 부상(扶桑)에 해 뜨는 일 내 몸으로 받을 줄 몰랐다 해를 묶어 등에 지고 함지(咸池)로 돌아오는 길 땅이 바다였고 하늘이 길이었다 여자의 생이 굴무기낭 같아서 해 뜨면 아픈 무늬가 새겨졌다 해 질 때마다 무늬가 지워졌다 그러는 사이 내 속에서 해가 뜨고 내 밖에서 해가 졌다 

*느티나무의 제주방언 

 

 

3.얼그레이가 있는 풍경

                                          김감우

그가 수선화 꽃말을 물었을 때
얼그레이 한 잔 온몸 붉히며 왔다
나는 얼른 그 문장 받아쓰지 못했다
창문 밖에서 사색을 길들이던 바람
단풍잎 사이로 발끝 바짝 세웠다
찻잔은 붉은 원 몇 개를 그렸고 
내 몸 속 빠르게 터널이 생겼다
썰물이 빠져나갔다 하강하는 몸 
저녁까치가 날개 쫙 펴고 날았다
찻잔 속 원이 파다닥 출렁거리며
검은머리도요새떼 날아갈 태세였다
하지만 어두워 질 때까지 나는
수선화의 붉은 꽃말 말하지 못했다
그의 손에서 뜨거운 차, 천천히 내려왔다 
또 썰물이었다 그 썰물, 감추고 싶었다 
나는 내 속의 캄캄함 들키고 싶지 않았다
붉은 얼그레이 입안으로 퍼지는 그 때
나는 영국 백작의 이름을 말했다
얼그레이 좋아했다던 은하수 여행기까지
나는 그 차를 다 마시지 못했다 
노란 수선화 한 송이, 은하수 펼친
밤하늘에 걸어두고 돌아와야 했다

 

 


4.바람을 만지며 놀다 

                                          김감우

회랑만 남은 사원에 걸터앉아
바람을 만지며 잠시 놉니다

호수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의 물기에
두 손이 파란색으로 흠뻑 젖습니다 

젖은 손으로 구름을 빚어서
커다란 비단잉어를 만듭니다

열대의 하늘에 어항을 만들어 놓고
키 큰 나무들을 심어 놓고

야자열매를 먹이인양 주렁주렁 
달아줍니다

세월이 마모시킨 석상의 발가락에
패티큐어를 발라줍니다

간지러운듯 간지러운듯
바람이 까르르 까르르르 웃으며 달아납니다

제국의 근위병들이 바람의 신발을 신고
저벅저벅 회랑을 돌아가고

내일의 일정이 즐거운 표정으로 찾아와
디저트는 뭐로 드시겠냐며 묻습니다

이쯤에서 불안해하는 바람을 안아줘야 할 것입니다
약속처럼 스콜이 퍼붓기 시작할 시간이니까요

 

5. 자백 

                                          김감우

얼마나 무거운 죄이기에
이 시간 놓치면 안 된다
네 잎이 앞서 네 목 치기 전에
혀란 혀 빠르게 내밀어라
바람이 제 귀 
팽팽하게 잡아당길 때 
산과 산 사이 바짝 
긴장하는 바로 이 순간

물소리 흰 입술 꽉 깨물고 
물갈퀴 바짝 잡아당기는 이때
저 산벚나무 
얼마나 기다렸던 것일까
이제부터 아홉 밤 열흘 낮을
내 죄 펑펑 다 고하라
염전 같은 속 다 펼쳐 보이며 
한꺼번에 다 내뱉어라 
들끓어 넘치는 저 하얀 산벚 
아름다운 자백

 

 

 

6. 꽃꽂이 강좌  

                                                                                                김감우


  과감하게 버리세요. 

  아까워 무작정 꽂았다가는 아름다울 수 없거든요 가장 간절한 여운 하나만 남기
고 모두 잘라버리세요 꽃이 죽어야 꽃이 사는 것이지요 1주지와 2주지 사이에는 바
람이 지나가는 길을 터주세요 비운 공간 속에 잘려 나간 꽃의 노래 흐르게 하세요 

  침묵하는 비밀을 터득한 말의 법이 오래 가듯
 

 

7. 봄 

                            김감우


나바조 인디언
한 노인이
들판에 꿇어앉아
기도한다

그에게는 봄이 오면 매일하는
일과다

그 들에 가서 종일
함께 엎드려 있고 싶다 

이 봄에

 

8. 식물성의 독거
 
                                          김감우
 
그 음나무 아래 서는 순간 내가 지금
얼마나 아픈지 털어놓고 싶었다
울주군 곡천동문길, 골목에 홀로 서서
백 번째 봄을 맞는다는 나무는
내게 우직한 가지를 먼저 내민다
마디마디 뾰족하던 날 세운 가시가시
다 어디 갔을까 몸속으로 거두었나
동안거 중인 듯 미동 않는 가지
바람이 지나가는 길은 가지 사이로 
미리 열어두었다 내 가슴에서 
열여섯의 노을이 번져오는 것을
느꼈다 심호흡 한 번 하고나면
노을의 붉은 기운을 빌려 오랜 
아픔 다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듬지 끝 새순 솟대날개처럼 달렸다
나무 밑에 빈 의자 하나 물끄러미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었는지 
지그시 눌러놓은 바닥이 떨렸다
고독하여 오래 독거하였기에
완벽한 사월 저물녘이었다

 


9. 별사 2 
  -김광석
 
                                                                                               김감우

 풀었다가 거두고 또 풀어헤치며 선하나 지켜내는 일이 생존의 경계가 되는 듯

 선과 선 사이 무채색 빛으로만 남기를 겨울 한복판에서 선하나 지켜내어 

 빗금으로 반짝이는 일이 가끔 아주 가끔 소리 다보내고 난 텅 빈 광장에서

 모두 함께했던 무대에 홀로 서성일 그대 목소리 그 소리 흉내 내는

 영혼의 자유 누릴 수 있기를, 그럴 수 있기를

 

 

10. 콩, 콩의 반란 
                                          김감우

여기가 어딘지 몰라 내다보고 싶었어
내 밖의 세상 궁금해서 견딜 수가 있어야지
처음엔 열린 틈 사이로 눈만 빠끔
내밀어 볼 참이었어, 생각대로 되질 않았어
촉촉이 젖어드는 재미를 알아버린 뒤
발돋움 해 보니 조금씩 시야가 넓어졌어
두런두런 세상 이야기가 날 유혹했어
기지개 켤 때마다 쭉쭉 늘어나는 다리는
내 머릴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어 
그러다 확 저질러 버렸어 머리에 쓰고 있던
콩이라는 둥근 이름표를 벗겨 내고
발가벗은 나신으로 겁 없이 나서 버렸어 
콩의 반란이었지만 나의 원죄인 
콩의 칼을 쓰고 콩나물이 되어버렸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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