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시 '나정호 시인.


나정호 시인의 시 미안하다, 릴케여 외 4편

- 나정호 시인

 

신라문학대상, 해양문학상 수상

 - 경기문화재단 문화예술창작기금수혜로

시집 불안한 꿈, 육필시선』 『달콤한 흔적외 다수

 - 희곡 첼로, 밤길외 다수의 공연작품

 - )롯데백화점 문화센터 강사  

 

미안하다, 릴케여

 

나를 스쳐간 바람이여 눈비 잠재우며 내게 돌아와 기력이 다해가는 바람들이여 죽은 자의 뼈를 묻으며 변두리를 환하게 밝혀주던 불빛들이여 길 위에 뒹구는 나뭇잎들이여 발등에 떠오르는 수천의 별 아래서 릴케를 노래하다 잠든 아버지여 그런 아버지를 이해하기에는 너무 멀리 흘러온 이 아들을, 세상에 함부로 던져놓은 미안한 어머니여, 수선화의 마른 꽃잎이여, 내 청춘을 꽃피우며 따라 흘러온 바람들이여 자꾸만 미안해지는 이름들이여 빨래줄서 나부끼는 속옷같이 세상에 꺼내 놓기에 너무 부끄러운 비밀이여 미안함이여, 모래 구릉을 넘는 낙타에게 부치는 편지들이여 삐딱한 내 청춘의 미안함이여

 

 

 

달밥

 

나무 아래서 손 벌리면 별이 몇 점 쏟아진다

감들이 덜컹거리며 으스러지기도 하고

별똥별이 나부끼다가 마구 떨어지기도 한다

감나무 보다 먼 서쪽 하늘에 대고

입 벌리고 서 있으면

가지사이로 별들이 뉘엿뉘엿 물들고

내 몸에 떨어져 뒹굴던 해거름의 잎사귀들

발끝에서 피어오르던 감꽃 그림자들

어린 날 떫고 비리던 달새 울음도

황망히 들려온다

그런 깡마른 저녁에

말랑말랑한 뭇별 한 점 꺾어다가

가지 끝에 걸어둔다 달 동네

사람들은 달을 어디에 걸어 두고 살아갈까

달밥이 둥실 떠오르면

나는 배고픈 새들의 길을 하늘꼭대기까지

환하게 열어둔다

그러다 둥지에서 슬그머니 잠든다

 

 

 

 

쌀을 사려고 인력시장에 나갔다

나보다 더 비실거리는 사람들이

고물 승합차에 잘도 실려 가는데

나만 덩그마니 남았다

새벽별이 멀어지고

드럼통에서 타닥거리며 타오르던 잡목들도

잠잠해지고,

선택받지 못한 것에 대한 수치스러움이

그대로 숯으로 남는다

쌀을 사지 못할 것이라는 절망감과

뼈가 으스러지는 일일 노예로부터

해방이라는 안도감 사이에서

저울 눈금이 왔다 갔다 한다

하지만 어느 한쪽도 마땅하지 않다

먹고사는 일에 마땅한 무게가 없고

정량이 없고, 레시피가 없는데,

 

그나저나 오늘 아침은

찬밥에 더운물이나 가득 말아야겠다

 

 

 

팬티와 자작나무

 

마른번개 울다 가더니 낮에는 해가 떴다

뭉쳐있던 근육이 풀리고 맨살이 바삭바삭했다

뼛속까지 하얘지겠다고,

세탁기서 한바탕 욕보고 나온 팬티가

자작나무 가지에 걸린다

그대로 부끄러운 정물화다

 

 

 

카메라 일기

 

카메라를 들면 무언가 받아 적고 싶어진다

빈손으로 보내기에 미안했던 가을날의 나무와 새들, 이따금

내게 말 걸어주던 기억 속의 싱싱한 얼굴들, 한 번 가서는

돌아오지 않을 이파리 같은 그녀의 이름도 몰래 적어둔다

짜릿한 순간들을 온몸으로 찰칵찰칵 받아 적으며

내게 이름 불러주던 사랑스러운 빛줄기들, 저기 깜빡이는

눈빛들이 부시게 소스라치는 울음 한 컷도 선명하게 받아 적는다

하늘가에 울먹이던 발목 삔 먹구름, 그 먹구름이

절뚝이며 걸어가다가 지우고 뭉개버린 모퉁이의 어스름,

별들의 눈짓도 가까이 당겨본다 아무리 벗어나려고 몸부림쳐도

자꾸만 벼랑 앞이던, 그래서 두려움에 떨리던 어린 날의

촉촉한 눈망울, 그 가녀린 눈망울 너머로 그리운 아버지가

뭉개 뭉개 걸어오시고, 저녁의 뭉게구름 송이 너머로

새 필름을 갈아 끼운 내가 아버지의 한 생을 받아쓰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