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시 '최혜영 시인'

최혜영 시인의 시 바람의 푸른 발목 외 4편

 

최혜영시인 약력

 

 서울출생

 다시올 문학 2009년 겨울호등단

 다시올 문학 운영이사

 ) 해담 유치원 원장

 

 

 

바람의 푸른 발목

 

제주에가면

뭍으로 걸어오는 바람이 산다

짠물에 발목을 적시며 건너오는 저 바람소리에

섬의 뿌리가 한자나 자라고

물길은 더 깊어져,

 

하늘의 이마가 아득한 수평선에 닿았다

하늘과 바다의 틈을 비집고 새들이 날아간다

 

밀고 당기는 바람소리에

섬은 잠들지 못하고

가벼운 것들은 돌을 매달고 바람을 견딘다

 

투명한 속살마저 다 보여주는

바람에 취해 잠들지 못하는 섬

파도가 일기 시작하면

선잠을 깨고 부스스 일어선다

 

내 몸에도 바람이 살고 있다

그 푸른 발목에 밟혀 한참을 앓았다.

 

 

 

세석장에서 보낸 편지

 

새벽녘 중산리 매표소 앞을 지나

먹빛 어둠을 뚫고 들어선 산길

숨이 목까지 차오르고 적막한 고요가 가슴에 안긴다

동이 트는 세석장을 향해

새벽안개에 무릎을 적시며 봉우리를 넘는다

 

법계사에서 천왕봉으로

천왕봉 넘어 만난 장터목에서 세석장 가는 길목

다람쥐와 쇠박새, 노랑턱 멧새, 굴뚝새, 어치,

길섶 지리바꽃과 구절초가

해마다 홀로 피었다 진다

 

세석장 시인마을

자연 속에서 한 편의 시를 만나보라는 현수막이 걸려있다

아담한 가판대에 진열된 낮익은 책들과 얼굴들

 

하늘아래 첫 번째 만나는 빨간우체통

물소리,새소리,맑은 바람을 담아

그리운 이에게 한 장의 엽서를 쓴다

 

이곳에 사는

물소리도, 구름도, 하늘도 모두 시인이다.

새 한 마리가 빈 하늘에 곡조 있는 시 한편을 쓰고간다.

 

 

 

삼십년 전의 눈이 내린다

 

눈이 내리는

자욱한 하늘을 올려다 본다

세상의 끝이 어디인지

참 아득하다

 

외딴섬

외등아래 골목길이 사라지고

눈이 세상의 소리를 다 삼켜

섬의 지붕은 더 낮아지고

개 한 마리가 껑충 거린다

발자국 꽃이 파도처럼 하얗다

 

그 예집 단발머리 소녀가

눈송이를 이고 눈을 굴린다

발자국이 얽혀 꽃송이가 활짝 핀다

 

개짖는 소리에

백일몽에서 깨어나는 삼십년전

 

지금 창밖에도 삼십년전의

눈이 날리고 있다

쏟아지는 하늘을 향해 컹 컹 짖어대는 개

저 개도 영락없는 그 옛집

마루 밑에 잠들던 우리 백구다

 

 

 

 

하얀 그림자

 

너를 떠올리는 소나기 내리는 밤

터질듯한 가슴 위로 빗줄기 바라보며

숨 고르기를 한다

 

눈을 감고 너를 그려보다가, 안아보다가

가까이 다가서면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마는

소나기 내리는 밤이면

 

목울대까지 차 오르는 숨 막힘으로

두근대는 떨림 하얗게 잊으려

너 떠난 그 길에 남아 있는

하얀 그림자를 따라 걷는다

 

 

 

 

에스프레소

 

새벽 두시

들길 따라 노란 벼이삭에 내려 앉은 어둠

좁은 오솔길을 따라 그대를 만나러 갔습니다

 

그대 머리위로 내려 앉은 하얀 이슬방울들이

에스프레소를 닮아 있습니다

 

을 거친 풍랑과 험난한 가시밭 길에서

온 몸 시퍼렇게 멍이 들어도

대못 하나 가슴에 움켜 쥐고 도착한 이 곳 지하낙원

 

네모난 그대의 방 앞을 서성이다 주저 앉아

힘없는 서러움에 떨어지는 이슬방울들

 

그대가 좋아하던 바나나우유, 에이스 과자

카스타드 케잌 몇 봉지

노란 후리지아 한 다발을 올려 놓습니다

 

나는 에스프레소 한 잔에 그리움 담아

찌든 욕망과 집착 내려 놓으며

호흡 고르기를 길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