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시 '이강하시인'

통도사에서 외 4편

[이름] 이강하
[약력]
* 경남 하동 출생.
* 2010년《시와세계》하반기 신인상 수상.
* 시집『화몽(花夢)』『붉은 첼로』등.

 

 

 

 

 

 

1. 통도사에서
                                      이강하

봄의 긴장이 최고점을 찍을 때
접혔던 몸이 활짝 열린다
천년 된 느티나무를 가로지르면
유연해지는 사이

꽃잎 떨어진 자리
그 사이사이는
아픔 그 이상의 단단함이 자라고 있다
크고 작은 잎은 점점 푸르러
오가는 사람 사이사이
겹친 그림자까지 사랑할 테다

오늘 나는 비상에 능통한 노란 나비
금강계단을 지나
무작정(無作亭)을 지나
바람 타고 높이 점프한다

오래전 가둔 욕심 하나
처마 끝 풍경을 댕그랑, 두드린다
골짜기들이 푸릇푸릇

마음을 비우면 누구든
저렇게 눈부신 찰나
완전한 사이사이가 되는 것이다

 

 


2.사과
                                      이강하

사과가 사라졌다 사과의 마음을 제대로 알지 못했는데 사과가 식구를 데리고 사라졌다 형은 내가 미워 떠난 게
아니다 동생도 내가 싫어서 떠난 게 아니다 우리가 서로 사과하지 않아 떠난 건 더더욱 아니다

불현듯 사과밭을 제대로 알아야 사과를 사랑할 수 있다는 아버지 말씀이 떠오른다 나뭇가지에 쌓인 바람을 뭉텅
자르던 상처 난 아버지 손등이 떠오른다 아마도 담장 밖 바람을 이해하지 못한 게 원인인지도 모르겠다 아직 사과밭에 향기가 진동하는 걸 보면

찢어진 향기 속에 웅덩이는 왜 그리 많은지 우묵한 물음은 왜 그리 촘촘 박혀 햇살을 끌고 다니는지 아, 이제
보니 고양이 동산이 너무 많이 늘어났어 눈밭을 뛰어다니는 새소리가 하얗다

뽀얀 입김이 길 너머 모퉁이를 바라보며 가늘어진다 입을 열면 모든 비밀이 새어 나올까봐 고요히 한쪽 벽에 숨
기는 것처럼, 여전히 식구들은 보이지 않고 용감하게 살아남은 사과 하나는 사과 모자를 쓰고 사과밭을 걷고 있다
함박눈이 펄펄 날리는데

 

 

3.둥지
                                      이강하

수십 미터 위 둥지가 나를 내려다본다
아침 해가 떠오르는 동안

그의 둘레는 공터이면서도 공터가 아니다 그러므로 새의 지저귐은 사계절 내내 강인하다 바람이 번개처럼 들락거
려도 태양과 구름으로 습도와 온도를 조절한다 메타쉐콰이어 정수리를 움켜쥔 그의 손가락들은 푸른 못에 박혀 있다
손가락 사이사이 돋아난 빛은 점점 찬란해져서 초봄의 뜨락 같다 내 심장을 흔들어대는 저 새들은 어느 별에서 왔을까
누구의 환생일까 낮달을 끌어당기는 옆구리의 힘이 예사롭지 않다 금세 낮달의 잎새가 갓 핀 울음을 쏟아낸다
어제와 오늘의 대화가 빗금 치며 팔랑거리듯 짙푸르게 더 높이 뚫어도 뚫어도 피가 나지 않는 허공,

저 파란이 나였으면
점점홍, 환상하는 소리의 집

 

 


4.손톱
                                      이강하
손톱은 물의 모퉁이다. 누군가를 잊고 싶다는 생각이 극에 달하면 더 길어진다.어제의 생각을 정리하면 다음 생각
이 또다른 물의 절망을 끌고 다닌다. 원고를 끝내고 조간신문을 읽은 후 당장 깎아버리고 싶은데 당신이 잘못될까봐
또 하루를 미룬다. 당신을 보지 못할까봐 여러 날 격한 일에 몰두한다. 그러다가 계속 내리는 봄비를 이해하지 못할
때는 아트 브러시를 한다. 차오른 엄마를 지우고 싶다고 다시 살고 싶다고 물방울 섞인 나뭇잎을 엄지손톱에 그려
넣는다. 지울 수 없는 모퉁이여, 더는 아프지 마오. 지독한 병에 걸리면 손톱은 자꾸 물렁하다. 골짜기가 두렵고 가
시 많은 울타리와 이별하고 싶고 내달리는 과학이 싫어지고 자신이 태어난 흙집도 싫다. 약속을 지키지 않는 그들이
못나 보이고 신체적 안위에 욕심을 부린 나는 더 추악해 보이고 그런 뾰쪽한 시간을 매달고 그것을 즐기듯 밥을 먹
고 화장실을 가는 뒷모습들이 슬프다. 더 절망하기 위해서 사과나무에 물을 뿌리는 물뿌리개가 되기도 하는 손톱은
더 슬프다. 사월의 손톱들은 물이 많고 아린 모퉁이들이다.

 

 

5.낙화
                                      이강하

저물녘, 송이송이 절벽이 내리네
숨이 멎을 만큼 싸한 파란이

흙에 닿기까지
몸부림이 멈출 때까지
얼마만큼의 우주를 구부려야했을까

잠깐 피었다지만
그 잠깐은 얼마만큼의 태양이었을까
얼마만큼의 달이었을까

오래전 우리가 만났던 그 자리
꿈의 바다가 하늘 머금고
붉게 타네

지극히 아름다운 피안, 나도
동백꽃처럼 편안해지고 싶네
먼 나라 낯선 섬에서
오래오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