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시 '한옥순시인'

빈집 외 4편

[이름]한옥순
[경력]
-1957년 경기도 동두천 출생
-2000년 「문학세계』등단
-시집『황금빛 주단』(원애드, 2011)
-시원문학. 소요문학. 우리시 활동

 

 

 

1.빈집
                                                       한옥순

늘,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눴다고 기억합니다
누군가와 차를 마셨다고 기억합니다
누군가를 기다렸었다고 기억합니다
누군가와 편지를 주고받았다고 기억합니다
누군가와 다투었다고 기억합니다
누군가와 눈을 마주쳤다고 기억합니다
누군가와 손을 잡았다고 기억합니다
누군가와 함께 있었다고 기억합니다

나와,
이야기를 나눈 것은 달빛에 젖은 빨래였습니다
차를 같이 마신 것은 등이 가려운 흰 벽이었습니다
기다림을 함께 한 것은 침묵하고 있는 전화기였습니다
편지를 주고받은 것은 텅 빈 우편함이었습니다
다투기를 했던 것은 내 발등에 쌓인 외로움었습니다

눈을 마주쳤던 것은 눈 먼 TV브라운관이었습니다
손을 잡았었던 것은 방문에 달린 문고리였습니다
함께 있었던 것은 조금씩 야위어가는 내 그림자였습니다

애기 집을 떼어낸 허전한 여자처럼
나의 집도 오래 전부터 비어있었습니다
이젠 기다릴 것도 포기할 것도 없습니다
이젠 마중할 것도 배웅할 것도 없습니다

내 이겅은 이제 접으려합니다
내 기억은 어제 상실되었습니다.

 


2.모란은 주재중입니다

                                                      한옥순
바람결에라도 봄소식이 묻어오면
명치부터 아려왔다
종이비행기에 쓰인 모란을 닮은
이름 때문에,

그 꽃,
벌써 피었다가 졌다는,
아직 못 봤다는,
본지 한참이나 되었다는 소문에
몇날며칠 에를 태운

그 이름
모란을 닮은 그 여자
그, 꽃 같은 여자를 누가 보았을까
어디서 보았을까

오늘밤은 전화를 걸어 봐도 될까?
꽃아 꽃아 너무 깊은 잠엔 들지 마라
봄날이 가려하니
아직은 아직까지는 봄날이 예쁘니
꽃술이 익어가는 봄밤에
나는 네가 지독스레 보고 싶으니

뚜 뚜 뚜 뚜 뚝,
지금 거신 전화는 없는 번호이니...

 

3.사이

                                                      한옥순

창경궁 통명전 뒤편 진달래꽃 나무아래에서
할머니 셋이 앉아 옛이야기로 꽃을 피우고
옥천교 옆 앵두꽃 흐드러지게 핀 잔디밭에
비둘기처럼 앉은 노인이 어제 날짜의 신문을 들추고 있네

하늘과 땅 사이에 가깝고도 먼 바람이 불고
그 바람결에 절정인 꽃잎들이 흩날리어 비로 내리니
반나절 사이에 대지는 아롱아롱 저승꽃을 피우네
새들이 앉았던 자리에도 그림자 꽃이 피었다 지네

꽃이 피고 지는 일이나
우리네 인생살이나
절정이란 건
단 한번이면 족하지 않겠나 싶네

봄꽃에 홀리는 사이
봄날은 슬그머니 지나가네
그 일이 아침과 저녁 사이만큼이나
순식간이네

 

4.첫사랑

                                                      한옥순

초등학교 6학년 봄이었던가 아니었던가
체육시간에 여자 애들과 왈츠를 배웠었던가
그 애의 가랑머리 끝이 내 가슴에 닿았었던가
그 애의 귀여운 덧니를 내가 보았었던가
그 애의 웃음이 너무 환해 잠깐 고갤 돌렸었던가
그 애가 그만 와락 울음 터뜨리며 달아났었던가
그 애의 뒤를 내가 곧장 따라갔었던가 아니었던가
그 애의 팔랑대는 치마 속을 내가 언뜻 보았었던가
그때 내 마음이 동동거렸었던가 아니었던가
졸업식 날 어색한 악수 나누며 서로 얼굴 붉히었었던가
편지 꼭 하자고 약속을 했었던가 아니었던가
그 애가 이사 가던 날 뻐꾸기가 울었었던가
그게 나의 첫사랑이었던가 아니었던가

나이 사 십에 처음 아파트 사서 이사 오던 날
엘리베이터에서 인사 나누던 앞 집 여자의 덧니를
내가 잘못 보았던가 아니면 어디서 보았었던가
그날 밤 뒷산에서 뻐꾸기 울음소리가
들었었던가 아니었던가

 

 

 

5.구불길

                                                      한옥순

군산 어딘가에 가면 구불길이라는 길이 있다는데
구불길이란게 꼭 군산에 난 길만 구불길인지
내 속내에 들어 있는 고불고불한 내장들도
따지고 보면 모두 구불구불, 구불길이 아닌지
 
세상에 억세고 질긴 것들과 딱딱한 것들
아무리 뜨겁고 진저리치게 차가운 것들이라도
작은 동굴 같은 내 입안에 들어오기만 하면 이내
순하고 축축해져 내장 구불길을 쉬이 내려가지

내가 먹은 나이도 내가 마신 세숼도
내가 삼킨 울음도 내가 들이킨 설움도
구불거리는 신작로 같은 내장 길로 떠나보내지
구불구불한 강물 같은 내장 길로 흘러보내지
내려가다 생각해보면 때론 기가 턱하고 막혀버려
구불길 급히 굽어진 데서 잠시 멈춰버리기도 하지
그럴 때 옹이진 가슴팍을 쓱쓱 쓸어내리면
바람이 밀 듯 다시 제 길 찾아 내려가기도 하지

구불길 구불길 하고 자꾸 되뇌이다 보면
어느새 세월도 구불텅구불텅 저만치로 흐르고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