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시 '박순 시인'

박순 시인의 詩 오후 3시의 골목길에서 외 4편

박 순 시인의 약력

 

강원도 홍천 출생

2015 년 시인정신 등단

서울시립뇌성마비복지관 작문교실 강사

자운문학회 동인

시집 페이드 인(2020)

 

오후 3 시의 골목길에서

 

 숨이 턱턱 막히는 끈적거리는 오후였어 골목길을 걷다가 헌옷 수거함 위에 앉아 있는 베개 하나 보았어 주황과 진분홍 체크가 어긋나 있는 커버로 어긋남은 삶의 또 다른 맞물림의 시작이 되는지 묵은 때가 군데군데 숨을 쉬고 있어 누군가에게 무게를 지탱해 주었을 , 삶이 문득 서럽다고 부둥켜안고 울었을지도 몰라 때론 방패가 되어 주었을 테지 갈기갈기 찢고 싶었을 그 시간들도 존재하지 베개가 필요하다는 건 살아있음일까 누군가 이 세상을 떠나보낸 후 불태웠을지도 몰라 아님 , 지금처럼 덩그러니 올려져 있을 수도 있겠지 긴 머리카락 몇 가닥도 누워 있네 그에게 눕히는 하루하루 계속 축축 늘어지는 그런 오후였어 지친 바람이 잠시 쉬었다 가려 하네

 

 

 

 

당신이라는 말

 

 살과 침이 섞여 들어간 밤은 거짓말이 되어 달아나고 있어 검은 빛은 창문을 반쯤 밀고 들어오고 있지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아 한쪽 뺨에 대고 옆으로 돌아누운 당신을 바라보았어 서로의 등을 마주 대고 있었지 언제부터 마주 보고 자는 게 불편했는지 기억이 안 나 등과 등을 마주 대는 시간 각자의 시간 속으로 걸어가고 있어 당신의 등에서 처음 보는 당신의 얼굴이 묻어 있어 살과 침을 섞었는데 말이야 익숙했던 코 고는 소리가 나에게 다가왔어 익숙함과 낯섦의 경계는……문득 , 그런 생각들이 밀려드는 새벽이네 당신이라는 말 속에 등이 살고 있어 지금 낯선 시간 속으로 떨어지고 있어

 

 

 

페이드 인 *

 

 

 물줄기는 지그재그로 흘렀다 무모하게 뛰어내렸다 절벽 앞에서 뒷걸음질 치고 싶은 날도 있을 것이다 부딪치고 튕겨져 나왔다 무른 바위의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시간은 계속된 지 오래 서로는 파편이 되어가는 시간에 충실했다 어느 한 날 폭포는 바닥에 떨어지기도 전에 얼어붙었다 산짐승의 이빨을 닮은 폭포는 바닥을 향해 매달려있다 겨울이 깊어질수록 폭포와 바위는 뜨겁게 엉겨붙었다 경계를 감춘다 겨울은 마취의 계절이다 눈을 좀 붙여보는 건 어때 ? 한숨 자고 나면 괜찮을 거야봄은 서로의 경계를 드러내는 통증의 시간 입술 위에 봄을 올려놓는다 , 그 환한 봄을

 

* 영화에서 검은 화면이 점점 밝아져 영상이 나타나게 하는 기법 .

 

 

 

레드 , 블랙

 

 

  화려한 조명은 끝이 났다 마크 로스코는 잊혀져가는 자신이 소름 끼쳐서 자신의 작품 앞에서 손목을 그었던 것일까 피로 그린 그림 , 미완성은 편집 중이다

 

  어떤 여자는 담뱃불로 남자의 어깨에 검은 장미를 그려 넣으며 웃고 있다

 

  어떤 여자는 SNS 흔적 지우기를 의뢰했다

  말의 무덤을 파헤치며 소란스런 이미지를 삭제 중이다

 

  이젠 그만 하라 이젠 지겹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아포리즘에 시달리는 어떤 남자

  밑바닥에 깔린 슬픔을 게워내기 전에는

  몸을 가눌 수 없다는 것을 자꾸 잊고 있다

 

  누가 누구에게 강요한다고 잊고 잊혀질 수 있을까

  저마다 기억의 방식을 달리할 뿐 ,

  견디고 견디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여전히 그림자로 남아 시간의 곁에서 서성이고 있다

 

 

 

달에게

 

 

1 : 정치적인 달 슬퍼하기엔 아까운 달 해와 달이 만나는 달

2 : 단순하게 살고 싶은 달 진눈깨비가 기다려지는 달

3 : 사랑에 빠질 것 같은 달 풀들이 수런거리는 달

4 : 입 다물었던 꽃들이 말하기 시작하는 달 맘껏 웃고 맘껏 울고 싶은 달

5 : 보드라운 바람이 볼을 어루만지는 달 장미향에 어지러운 달

6 :시인 김수영이 그리운 달  때 이른 더위에 몸이 적응하기에 숨찬 달

7 :장마로 멜랑콜리한 달 다시 시작하기에 늦지 않은 달

8 : 익어가기 위해 온 힘을 다하는 달 오뚝이가 되고 싶은

9 : 손을 뻗어 햇살을 흔들어보고 싶은 달 마음속의 달이 꽉 찬 달

10 : 억새가 신나게 춤추는 달 시를 베푸는 달

11 : 나란히 걷는 달 어둠이 깃드는 시간이 빨라지는 달 모과향이 짙어지는 달

12 : 날카로운 키스가 시작되는 달 만남이 한꺼번에 이루어지는 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