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광자 시인의 詩 법륭사 기둥 외 4편
조광자 시인 약력,
2009년 시와산문으로 등단
시원 문학회 회원
시와 산문회 회원
시의 밭 동인
법륭사 * 기둥
이천 년 동안
하늘과 땅을 이어주던 나무가 쓰러지면
햇볕과 바람과 물의 입맛을 버리고
몸을 가볍게 말려야
묵은 마음이 순하게 풀어진다는데요
원시림의 생명들이 품어내던
가쁜 호흡의 나이테가
마른 향기를 품을 때까지는 죽어서도
딱 , 오십 년이 걸린다는데요
단단하게 뿌리를 내렸던 고집도 꺾이고
하늘을 올려다보던 가지도 잘라버리고
생존의 내력이 온화한 곡선을 그릴 때
비로소 법륭사 기둥으로
새로운 삶을 살아간다는데요
천 삼백 년 동안 무거운 도량을 받들고도
아직도 청정하다는데요
불법의 향기가 두루 충만하다는데요
단 하루만이라도 나는 묵은 생각을 버리고
누구에게 든든한 기둥이 되어 보았을까요
쉬지 않고 들끓는 가슴에
잘 익은 향기 한번 품어 보았을까요
두 팔을 벌려 법륭사 기둥을 슬며시 안아 봅니다
⃰일본 나라현에 있는 절 , 담징의 벽화가 있음
일출
생각하건데 , 내가 살아온 날들에서
내세울 만한 가슴 떨리는
절정의 순간을 마주한 적 없어
차고 오르는 환희의
뭉클거리는 오르가즘을 느껴본 적이 없네
기호가 헤엄치는 바닷속으로
누군가가 전송해 온 몇 컷의 이미지에 홀려
타오르는 저 붉고 장엄한 절정의 순간을 훑는다
무디어가는 몸을 데우기에는 이미
시들한 감각을 세워
푸른 관음의 가랑이 사이로 아득히 솟아나는 불꽃
부르르 탯줄이 떨어진다
핏빛 , 바다가 들어 올린 아이
첫 울음이 낭자하다
매향리에 부는 봄 , 봄
매향리에 봄이 오면
녹슬어 가는 포탄 아래
민들레가 지천으로 핀다
푸줏간의 찢어진 고깃덩어리가 흘리는
핏빛 눈물을 먹고도
저리도 고운 자태로 피어나다니
노란 꽃잎이 지고
화관인 듯 ,
성스러운 후광인 듯 ,
매향리에 봄바람이 불어오면
산으로 들판으로
철조망 너머에서 울먹이는
폐허의 농섬까지 씨앗이 흩날린다
걸개에 걸린
무거운 침묵의 함성으로
잡은 손 놓지 말자고
작은 풀꽃까지 잇대어 피어나는
봄 , 봄
멀리 안개가 기어 다니는 갯벌에는
몸에 박힌 총알의 고통을 아는지 모르는지
터지지 않는 열꽃을 가슴에 품고 산다
그 속에 깃들어 사는 매향리 ,
오발탄의 봄은 그렇게 간다
앙코르 왓트
당신이 들려주고 싶은 노래
당신이 보여주고 싶은 노래
늘 , 그렇게
목이 말랐다
들을 수 없고 볼 수도 없는 먼 이국의 사원과
사원을 지키는 나무의 이력과
내 전생의 이데아였을 , 신들의 궁전을 지키는
무겁게 짓눌린 돌탑의 고행
조금씩 , 조금씩 야금거린
이끼 낀 희미한 미소가 남아 있는 곳
시간 너머의 왕국을 찾아
여러 생이 꿈꾸고 간 천 년의 흔적을 지우는 일
춤추는 환각 속을 무너져 내리게 하는
보이지 않는 불가사의의 힘
어느 행성들 사이를 유랑하는 그들의 전생을 엿보는 일
만큼이나 멀고 , 느리게 다가오는
눈을 감아야만 들리는 거대한 침묵의 함성이 있다
두 개의 길
가을 억새의 사원으로 순례를 떠나요
한 무리의 살찐 돼지가 트럭에 실려
앞서거니 뒤서거니 같이 가요
몸 한번 바로 세우지 못하고
짐짝처럼 실려 가는 저들의 순례길은
흔들리는 무게를 버리는 일이에요
가벼워져야 날 수 있어요
풀썩거리는 먼지는 산의 허리를 깎아내려요
허방에 몸을 날리는 것들의 주검 위로
파릇파릇 초록 피돌기가 돌아요
물음표를 따라 오르는 가쁜 숨소리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돼지의 순례길은
죽음으로 가는 마지막 길인 줄 알고 있었을까요
민머리 능선에는 억새의 사원이 숨어 있어요
손닿으면 베일 듯 날 세운 은빛 말씀들
가벼워져야 한다고 햇볕을 당겨 바람에 말려요
바람에 날려 온 경전 한 구절이
안전지대 없는 내 마음에도 활짝 피었어요
겨자씨 한 톨 심었어요
어느새 , 돼지들도 눈앞에서 사라졌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