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경선 시인의 약력
여수시 거문도 출생
2004년 『문예사조』등단
시집 『어찌 이리 푸르른가』『그 섬을 떠나왔다』
바람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푸르던 바다 물색없이 헤살 거리고
나비 엉겅퀴꽃에 꽂혀 휘청이며 날자
삘기꽃 온몸 흔들며 깔깔깔 웃어 재낀다
까칠하던 풀숲 다복하게 되세워질 때
녹산 능선에 앉아 내 안의 바람 잠재웠고
똬리를 풀던 고사리를 보면서
때를 놓친 건 아닐까 싶어
몇 날 며칠 끙끙 앓기도 했다
구실을 찾아야 했으므로
고요가 서걱거릴 때까지 입을 닫고
마음 출렁이는 곳에 눈길을 주었다
바람은 가득히 펼쳐지다 수평선으로 사라지는가 하면
어깨를 잇대고 밀려와 바위를 삼켰다 뱉고
삼켰다 뱉는 그 순간
바람의 날개가 눈부시게 펼쳐졌다
애초에 그랬던 것처럼
바람은 수억 년 전부터 그렇게 시작되었다
뱃고동 소리에 바다가 흔들린다
떠나야겠다
그 섬 거문도
곱발 디디면 바다가 보이는 고만고만한 돌담 집이거나
얼기설기 묶인 지붕 너머 바다의 정수리가 훤히 보이거나
몇 발짝 골목을 나서면 시푸른 바다로 통하는 곳이다
혀 둥글게 말고 턱 빠지게 하품하며 느릿느릿 걷는 고양이 폼이 적나라하게 고요를 느끼게 하는 곳
저 혼자 불 밝히는 등대가 있고
전설처럼 *신지께가 어부를 지켜주는 곳
손끝 유달리 까매도 부끄러울 것 없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다
온몸으로 바람을 막고 온몸으로 바람을 받아들이는 곳
하늘과 바다가 허락해야 닿을 수 있는 바로 그 섬
어야디야 어기야 디야
어쩌다 들려오는 사무친 뱃노래
어~야 디야 어~기 여차 어야디야 어기 여차
이어 되뇌다 먹먹해지는 그 섬을
나는 떠나왔다
*거문도 사람들이 인어를 신지께라 부름
어머니의 낙(樂)
아침나절 안개 가득하다는 고향 소식에
집에 있으라던 당부는 잊었는지
수화기 너머 신호음만 파도처럼 들린다
별일 아니라는 듯 익숙하게 갯가로 스며들었다는 걸
보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다
스멀스멀 앞섬이 사라지고 하나둘 능선이 지워지면
낮은 집들도 자우룩하게 잇대어지는 거문도
갯가로 나선 길 따라 마음 길이 그렁그렁 보인다
인동초 흐드러진 서당이끼미 지나며
화전놀이 하던 어여뻣던 시절을
걷다 걷다 뻐꾸기 소리 들리면
까슬까슬한 보리 이삭 주웠던 때를
갱번에 닿으면 가마때기 쭉 깔고 멸치를 말리던
풍요로운 한때가 그리워서
사무치게 그리워서 그 길을 걷는다는 걸
말해주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느지막이 돌아오는 길 따라
은하수 흩뿌려진 새하얀 아미초 꽃길 지나
노란원추리 가득한 언덕에 걷다 쉬다 걷다 쉬다
도착했을 거라는 걸 알고도 남는다
해거름에
수화기 닳도록 들었다 놨다며 투정 부리니
출렁이는 목소리로 안개 다 걷혔다며
이 빠진 웃음 사이 고동과 보말 따고
가쁜 숨 내쉬며 거북손과 담치 캔 이야기
수만 겹 파도소리 들려주며
그거라도 해 보내야 낙(樂)이재 하신다
물수국
하루에 네 차례씩 투석 줄 매달고
앞으로 뒤로 몸을 흔들어야 했던 아버지는
뱃길 꽁무니 따라 몽글몽글 하얗게 이는 물수국 같았다
그랬다
몸속 수액을
비우고 채우기 위해
물결 일렁이듯 출렁거리고
몸 흔들다가
야윈 아버지 바스러지고 말 것 같던
시린 오후
어느 곳에도 초점을 맞추지 못하던
그 공허한 눈빛 떠올라 애써 눈길 돌려도
자꾸만 물수국 피어나는
붉은 저녁
무지갯빛 물살 가르며 다다른 고향
돌담길 따라 걷다 보면
바랜 문 열고 기다리고 계실 것 같은 아버지
넉넉한 마음으로 호령하던 그 바닷가
여름밤 선창가에
가마니와 돗자리에 누운 사람 없고
멸막에 올라선 폐선 위엔 풀이 자라고
꼴뚜기 오징어 나눠주던 인정도
펄럭이던 만선 깃발도 보이지 않네요
파도에 조약돌
끝없이 구르던 곳에
차 달리는 해안도로가 생겼고
바다 위에 놓인 연도교로
섬은 둥글게 하나로 이어졌습니다
먼바다 드나드는 녹문은
여전히 깊고 짙푸르기만 한데
마음결을 아는지
아프게 출렁이다가
빈 소라에 채워지는 바람소리 아득합니다
신명 날때면 어김없이 막내딸 없고
귀하고 귀하게 자라라며 엉덩이 토닥이던 아버지
당신 앉으셨던 해변 어귀에 서서
빨갛게 물드는 저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