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구하 시인의 약력
* 1965년 충남 금산 출생
* 2004년 『자유문학』으로 등단
* 시집 『물에 뜬 달』, 『화명』
* 산문집 『바다로 가는 나무』
화명
함께 이루는 생은 얼마나 황홀한가
상주시 부원동 석운도예공방
토끼랑 닭이랑 네 집 내 집 없이 드나드는 앞마당 한쪽
늙은 호박 한 덩이
생을 이어주던 넝쿨넝쿨 다 어디가고
무거운 육신 밤새 내린 하얀 눈 속에 묻혀
노을빛 속살 덜어내는 중이다
검붉은 깃털 윤기 잘잘 흐르는 장닭 다가와
누비 눈으로 감싸인 어깨 부리로 쪼는 순간
덩덩, 북소리가 난다
해진 앙가슴에 달라붙은 토끼 두 마리
고개 갸웃거리며 갉아댈 때
샤샤샥 일렁이는 중심의 물결
생의 소리가 저 늙은 호박에 다 들어앉아 있나
감나무 아래 백구도 어느새 담장을 타고
허공을 향해 컹, 컹, 후렴을 한다
소리가 소리를 키우는 눈부신 고요
나무에서 물고기를 구하다
나무 열매를 먹는 물고기가 있다네
물에 떨어진 열매 아삭아삭 삼키고 잘 여문 씨앗을 배설한다네
나무는 물고기의 혈통이라는 생각
그래서 연목구어라는 말도 가능태로 다시 명명해야 하지 않을까 궁리해보네
숲은 스스로 길을 내는 물소리 물고
아주 먼 길 거슬러 유영하는 어족의 나라
뜨겁고 습한 우기를 건너 하늘도 푸르게 한숨 자고 일어나면
바람 한 타래 알을 매달고 둥근 물결 이파리 사운거리네
랄랄랄라 나무 한 마리 두 마리 꽃을 피우네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낮은 곳에서 더 어두운 곳으로 흔들고 흔들린다네
세상 가장 슬픈 목숨은 나무로 서 있는 물고기 부족
눈물이 범람할 때마다 깊은 잠을 헤엄쳐 어린 물고기 돌아온다네
당신이 허공으로 두 팔을 뻗는 동안
물고기 몸에 나뭇잎 문양을 새겨 넣으며 또 하나의 영토를 건설하는 나무가 있다네
상강
기러기는 오지 않았습니다
허리 휜 구절초 마당가에 두어 필 몸을 풀었습니다
술이나 치자
꽃잎 한 점 술잔에 둥둥 떠올랐습니다
빗물받이 녹슨 양철통에도 바람 소리 흘러내렸습니다
말라가는 기억으로 색색한 시절을 몽땅 비워내고도
집 앞 느티나무 위독합니다
산마루에 걸터앉아 골똘히 턱 괸 하얀 달빛
도랑물 소리 점점 커졌습니다
고드름
벌써 며칠째, 이 죽도 저 밥도
통 뭘 먹지 못하겠다는 아버님
뜨끈뜨끈 드시고 싶다는 추어탕
겨우 두어 술 애써 넘기더니
아이구, 쓰다 왜 이리 쓰나
우두커니 한숨 쉬며 퀭한 숟가락 내려놓고
물 한 잔을 드신다
거 참, 달다 참 달다
오래된 밥상머리 기억 더듬으며
벌써 며칠째, 축 늘어진 중환자실 링거액만
한 모금, 또 한 모금
흰 고무신
오래된 비탈 묵정밭 일궈 어머니는 고사리를 심었다
구부러진 몸 비탈을 향하여 수굿하게 기어올라야
허리가 아프지 않다는 것
평지가 오히려 비탈일 때 많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비탈과 한 몸이 되어 오르내리는 염소처럼
두 손도 발이 되어 고사리순 꺾을 때면
허공의 구름도 허리를 쭈욱 펴고 뒷산을 넘어가고 있었다
어머니 낡은 신, 비탈밭에서도 미끄러지지 않고
세상을 반듯하게 펴고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