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시 '김경성 시인'


김경성 시인의 詩 다정한 연인 외 1편

김경성  시인 약력

전북 고창 출생 . 2011 미네르바등단 .

시집 와온』 『내가 붉었던 것처럼 당신도 붉다가 있음 .

 

 

 

다정한 연인

 

세상의 모든 골목은 닮아있다

 

옆구리에 끼고 가는 골목은 애인 같아서 이따금

무릎 같은 계단에 앉아 쉬었다 가기도 하고

 

제가 나무인 줄 알고

전단지를 이파리처럼 흔들어대는 전봇대까지도 다정해서

늘 그날인 것처럼

고백 못하는 내 안의 상처나 슬픔까지도 다 받아준다

 

깊은 저녁 혼자 가는 길을 따라오는 그림자 있어 뒤돌아보면

그도 뒤돌아보며 괜찮다 , 괜찮다

토닥토닥

 

반쯤 접혀서 잘 보이지 않았던 길을 오고 갔던 사람들은

지금 어느 나무 아래에서 쉬고 있을까

 

이따금 밥 냄새가 작은 창문을 빠져나와 골목 안쪽까지 배부르게 하고

 

나는 봄밤에 울컥울컥 피어나는 매화처럼 이파리 한 장 없이도

멀리 아주 멀리 향기 보내는 법을 배운다

 

골목에서 자라고 익어갔던 사람들이

먼 곳에서 불쑥 찾아와서

제 안의 숨은 그림을 찾아 퍼즐을 맞추며

어떤 조각은 생각하지 말자고 눈 속에 비치는 제 얼굴을 바라본다

 

휘어지고 구부러진 채로 그 자리에서 늙어가는 골목 ,

깊숙이 간직했던 시간이 여기에 다 있다고

나무 대문이 삐걱 소리를 내며

저절로 열린다

 

달아나고 싶어서 가장 멀리 가는 버스를 탔어도

끝내 되돌아오게 만드는

다정한 연인의 끌림

 

 

 

 

유목의 시간  

 

 

떠나는 것들은 그 사연조차도 말하지 않는다

다만 바람이 불어가는 쪽으로 비가 긋고 가는 길을 따라 흘러갈 뿐

어제는 비가 와서 꽃이 피었고 , 꽃을 먹은 양 떼는 넘치도록 젖을 내어주었다

문을 열어 바람을 들인다

몸속에서 키우는 숲 속 나무가 잎을 편다

 

해와 달이 둥근 창으로 드나드는 사이

초경을 건넌 처녀는 제 몸속에 아이를 들이고

건너고 또 건너서 닿은 구릉 너머에서는

 

말을 타고 달리던 청년이 입안에 고인 침으로

새들을 키운다

높이 나는 새들이

먼 곳에서 부는 마른 바람의 서걱거림까지 그대로

청년의 입속에 넣어준다

 

사막에서 집들은 고래가 되어 엎드려있다

고래 뱃속에서 자라는 나무가 한꺼번에 몸을 포개어 지느러미를 흔들어댈 때

고비 사막에서는 물 흐르듯 몇 마리의 고래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유목의 시간은

게르에서 시작해서 게르에서 익어간다

 

 

 

 

파미르에서 쓰는 편지

 

 

마음의 뷰파인더 속으로 들어가 있는 풍경이 익어서

암청빛 저녁을 풀어놓을 때 별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세상의 별들은 모두 파미르 고원에서 돋아난다고

붉은 뺨을 가진 여인이 말해 주었습니다

 

염소젖과 마른 빵으로 아침을 열었습니다

돌산은 마을 가까이 있고

그 너머로 높은 설산이 보입니다

 

아이들의 눈빛이 빛나는 아침입니다

 

나귀 옆에 서 있는 사람의 그림자가 나무 우듬지에 걸쳐있고

풀을 뜯는 나귀의 등에는 짐이 없습니다

 

아이들의 웃음소리에 백양나무 이파리가 흔들릴 때

왜 그렇게 먼길을 떠나왔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주머니에 가득히 주워 담은 별들이 차그락거립니다

 

당신은 멀리 있고 설산은 점점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고원에 부는 바람을 타고 나귀가 걷기 시작했습니다

나귀가 노인을 이끄는지

노인이 나귀를 따라 가는지

 

두 그림자가 하나인 듯 천천히 풍경 속으로 들어갑니다 .

 

 

 

물고기 몸에 물이 차오를 때

 

 

   

물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바람의 힘을 빌려 바다가 쏘아 올린

섬을

우리는 사막이라 불렀다

 

물고기 비늘이 석양에 반짝이며 휘몰아치고

차도르를 쓴 바람이 사구를 넘어가는 곳

 

꽃을 문 사막의 나무는 모래 속에 제 몸을 파묻고는

밤이면 이슬을 끌어 모아 숨을 피어올리고     

리넨으로 칭칭 감은 미라처럼 햇빛을 뒤집어쓴 물고기 뼈가 나뒹굴었다

 

 

말을 잃어버린 늙은 개가 사막여우가 되어 어슬렁거리며  

긴 혀를 내밀어서 부드러운 문자를 써 내려갔지만 

그 누구도 읽을 수 없게 금세 지워졌다

   

바다가 제 속에 품고 있는 것이 사막이었다는 것을 왜 몰랐을까

   

서걱거리는 바람을 가슴에 품고 사막으로 걸어 들어갔다

   

애초에 바다였을 사막 

순식간에 날아오르는 모래바람이 다시 바다 쪽으로 가고 있다

   

살이 빠져나간 물고기의 뼈에 한 스푼의 물이 고인다

 

 

 

 

모란문 찻사발과 바다

 

 

속성을 잃어버린 것들도 긴 시간 끝으로 가서 보면 처음의 마음이 남아있다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입술의 지문은 지워지고

밀물과 썰물의 주름을 타며

인도차이나반도 눈썹 끝에 올라가 있다

 

뿌리가 없는 그는 바닷속에 노숙할 집을 지으며

가끔 바다의 등지느러미에 올라가서 별이 되고 싶었으나

바닷속 둥근달로 떠 있다

 

찻잎을 담고 차향을 머금었던 몸으로 따개비를 끌어안았지만

세상 밖으로 나가는 일은

보이지 않는 길을 찾아 날아가는 새들의 부리만큼이나

단호하게 닿을 수 없는 뜨거움이었다

 

 

모란꽃에 붙은 따개비의 가계는 꽃잎 번지듯 천천히 몸을 불려 가고

닻을 내린 목선 木船 의 휘어진 선미에도 오를 수 없는 아득함

그 누구에게 위안이 될 수 있을까

 

오직 우물 같은 몸 안에 바다를 담아놓고

수평선의 본선이 되고 싶을 뿐

 

찻사발 모란꽃에서 날갯짓하는 나비 위에

휘어진 실금이 어디론가 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