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시 '김나비 시인'

김나비 시인의 詩 디스토피아 외 4편

김나비 시인 약력

청주 출생

2017년 한국NGO신문 신춘문예()

2019년 부산일보 신춘문예(시조)

수필집내 오랜 그녀』『시간이 멈춘 그곳

시집 『혼인 비행』(2020년)

 

 

디스토피아

 

오늘 새벽 330

네가 내 가슴에서 이륙했다

탑승했냐는 문자에 차갑게 대답을 얼리고

잘 가라는 톡에 입술을 봉합한 채

 

이제 내겐 전쟁이 없겠다

인생은 초콜릿 상자와 같다*고 했던가

장미가 얼굴에 핏발을 세워가며 담을 넘던 유월

내게 배달된 초콜릿 상자

울퉁불퉁 만들다 만 새까맣고 거친 알맹이

어느 것을 집어 들어도 칼날이었다

 

오븐에서 익어가는 빵처럼 천천히 부풀던

처키처럼 웃으며 내 심장을 찌르던

시멘트 담장 모서리를 급히 돌다 쓸린 팔뚝 같은

내 허공에 하얀 절망의 비행운을 그려준 너

 

오늘 새벽 557

보잉B777 한대를 격추시켰다

감은 눈두덩 안에서 이리저리 굴러가는 눈동자

그 속에 네가 묻어둔 물관 흐르는 소리를 들으며

지옥에서 보낸 한 철**을 농담처럼 떠올린다

 

어미 개의 몸에 붙은 죽은 새끼 냄새 같은

너의 얼굴을 툭툭 닦아낸다

뾰족한 기억이 침대 위로 떨어진다

 

*영화 포레스트검프에서 인용

**랭보의 시 제목

 

 

 

 

히키코모리* 

 

 

껍질을 벗는 것은 목숨을 거는 일

나는 익숙한 것과 낯선 것의 경계에 산다

오늘은 11번째 나를 버리는 비명의 종착점

단단하게 벗겨지는 또 다른 나를 본다

암전된 소리 틈에서 돋아나는 검은 비명을

몸속에 구겨 넣으며 시간을 갉아먹는다

 

컴퓨터와 텔레비전 속은

어둡고 따듯해 내가 살기에 딱 좋은 곳

아무도 내게 말을 걸지 않는다

말없이도 말을 할 수 있는 건 내가 꿈꾸는 세상

내 영혼을 각진 블랙홀 속에 묻는다

나를 흡입하는 어둠 속 환한 세상에서

종일 빛을 끄고 그들과 시간을 분할한다

 

사람들은 왜 같은 발자국만을 찍으려고 할까

내게 달콤한 음식을 내놓는다

세상을 맛보려 더듬이를 내밀 때마다

온몸을 찌르는 차가운 빛의 칼날들

칼을 던지는 사람들의 발소리에 구석으로 몸을 숨긴다

한 걸음 물러서면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을까

어둔 세상을 더듬는 깊은 침묵

나는 작은 바퀴벌레다

 

*은둔형 외톨이

 

 

 

 

시간의 프랙탈

 

 

두고 온 성대를 찾고 있을까

교정에 마른 목소리만 소복이 쌓이고

휑한 눈빛은 먼 산을 뒤적인다

얼마나 말을 삼켜야 말을 할 수 있을까

 

벌어진 입속엔 칸나 빛 혀가 피어있고

꽃잎 양옆 덧니는 설익은 밥알처럼 뾰족하다

꼬리는 깨져서 철골이 드러나고

금이 간 지 오래인 듯 까만 먼지 낀 등줄기 아래

으스러진 꼬리가 아슬히 그네 타는 호랑이 동상

 

떠나온 산을 향해 눈빛을 던지며

고인 말을 몸에 말아 넣는 호랑이를

먼발치에서 지켜보는 까만 피부의 남자 크리티안

먹이를 찾아 소리를 지운 채 붙박이가 된 시간을 보며

필리핀에 두고 온 아이를 떠올린다

 

파종된 시간 속 일 년이 피고 다시 하루가 열리고

시간의 프랙탈 속에서 목 안에 흐르는 말을 또 얼린다

박제된 말들이 밥알처럼 그득하다.

 

 

 

그리고 내가 있었다*

 

그녀가 없는 손으로 목을 조인다

창가의 포인세티아가 빨간 비명을 지른다

콘센트에서 피기 시작한 꽃들은

새를 쫓는 바람 인형처럼 춤을 추고

방안은 뿌연 음악이 깔린다

그녀의 투명한 손가락이 점점 힘을 더해간다

 

소금 뿌려진 미꾸라지처럼 몸을 뒤틀며 뒹구는

남자의 몸 위로 여자가 기어 올라온다

그녀는 온몸의 살을 풀어 구멍을 찾는다

눈을 핥고 콧속을 핥고 온몸을 핥는다

몸통을 샅샅이 애무한 그녀는

홑이불처럼 남자를 덮는다

 

손가락이 감나무 가지 위 흔들리는 나뭇잎처럼 가늘게 떨리고

몸은 젖은 빨래처럼 늘어진다

여자는 한동안 굳어가는 남자의 주변을 서성이다

창문 틈으로 스스르 빠져나가 버린다

머리카락 하나 떨어뜨리지 않았다

 

까맣게 타버린 방안

나는 벽에 둥글게 걸린 채 그을린 남자를 품고 있다.

남자의 누운 몸이 밤새

반짝이는 내 얼굴에 수묵화를 찍는다

 

아무도 내게 물어오지 않는다

 

*And Then There Were None(1945) 범죄/미스테리/에서 착상

 

 

 

히치하이킹

 

그녀가 담을 넘고 있다

긁힌 얼굴은 피로 가득하다

햇살이 부신 창을 던져 허리를 찔러도

빗줄기가 축축한 손으로 머리채를 휘감아도

허공을 온몸으로 들어 올리며

입술을 깨문 채 넘고 있다

어디선가 Donde Voy가 흘러나온다

 

지나던 바람이 등을 내밀자

바람을 타고 길로 나서는 그녀

붉은 몸을 펼쳐 단 한 번 날갯짓으로

추락을 가장한 비상을 한다

몸이 퍼즐 조각처럼 바닥에 흩어진다

그녀를 태운 발소리들이 사사베*를 향해 멀어진다

 

담장엔 소문이 무성하게 가시를 세우고

떠나지 못한 장미들의 모의가 몽글몽글 피어난다

그녀는 지금쯤 누군가의 신발에 묻어

자정의 국경을 건너고 있겠다

 

*멕시코 소노라 주 사사베에 미국으로 입국하려는 멕시코 난민들을 차단하기 위해 설치한 거대한 미국-멕시코 국경 장벽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