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준경 시인의 시 슬퍼도, 봄 외 4편
윤준경시인 약력
주부백일장 2회입상 신사임당백일장 2위입상
한국시인협회회원, 국제PEN펜한국본부회원
도봉문인협회 부회장
한국가곡작사가협회이사, 공간시낭독회상임시인
시집 『시와 연애의 무용론』 등 5권 출간
슬퍼도, 봄
식음을 놓칠 걱정도
자고 나면 길이 되었네
누리장꽃 같은 생의 향기가
이따금 사는 이유를 물어오지만
둥지에서 밀려난 붉은머리오목눈이도
알몸으로 이 강을 건너야 하리
뻐꾹새 기쁜 듯 울고 간 한나절
날은 차츰 쉬 어두워오고
절망을 뒤집어 싹을 틔우면
슬퍼도, 봄
산도 강물에 두 발을 담그고
제 그림자를 쓰다듬고 있네
나 한 그루 나무가 되어
내 평생 바라던 일은
한 그루 나무가 되는 일
나무나라 푸른 숲으로 가서
공주든 하녀든 무엇이든 되는 일
나무나라에서는 공주나 하녀나 똑같지
이 나무 저 나무 안아보며
나무의 언어와 침묵을 배워
그들의 발을 씻겨도 좋고
내 발을 맡겨도 좋으리
온종일 숲의 향기가 내 몸을 싸고돌아
앉아도 서도 나는 한 그루 순한 나무
가슴에 입을 대보고 흠흠 냄새를 맡아보며
세상에서의 하루처럼 바쁠 일도 지칠 일도 없이
근심도 노여움도 가까이 올 수 없는
나만의 나이테로 벅차오르겠네
어느 나무도 독한 말은 안 하지
가시나무 붉나무도 거짓말은 안 하지
그들의 뿌리를 사뿐 밟고
안녕? 반가워!
나무의 언어로 말하며
어쩌다 나뭇잎 건드려 상처를 내면
미안해, 미안해 호호불어주고
괜찮아, 괜찮아 싱긋 웃어주는
나무의 넓은 마음도 배우겠네
나 세상에서 딸 노릇 어미노릇 사람노릇 해봤지만
어느 것 하나도 제대로 하지 못했네
이제 평생 원하던 나무나라에서는
공주든 하녀든 열심히 해보겠네
사랑도 미움도 모르는 나무의 나라
인생의 헛된 면류관 다 버리고
나 맨발로 숲으로 가서
나무의 생각, 나무의 언어, 나무의 향기로 살아보겠네
그것은 내가 평생 꿈꾸어온 일,
사람의 도시여 안녕,
나 나무나라로 가네
자작나무 눈물
아들이 자작나무 물을 가져왔다
물오른 자작나무에서 빼낸 물, 노폐물이 싹 빠진다고
어서 마시라고
에미가 제게 보약 달여 먹이듯
한 컵 가득 들이민다
풋풋한 나무의 향, 처음엔 싱싱한 수액이더니
마실수록 찝찔한 자작나무 눈물이 들어있다
뿌연 눈물에 자작나무 붉은 피가 섞여있다
칼바람을 마시며
젖을 빨아올린 자작나무, 내 안에 들어와
끙끙 신음을 토한다
여기저기 갈라진 틈을 메우며
팍팍한 생을 어루만지며
자작나무 제 눈물로 나를 적신다
한그루 자작나무 나, 푸르게 일어선다
강물의 트라우마
무심히 흐르는 강이라고
함부로 말해왔다
말이 없다고 하마
생각이 없겠는가
하마 오목한 슬픔이 없겠는가
숙명처럼 흘러가며
버리고 버리면서
돌이킬 수 없는 선택에
후회인들 없겠는가
얼어가는 제 몸을 내려다보며
두려움이 없겠는가
죽음의 공포인들 없겠는가
무심한 듯 흐르지만
멈추고 싶을 때 멈춰 서서
제 상처를 만져주지 못하는 운명
빛나는 은률 사이사이
기쁨의 감탄사 밑으로
자멸자멸(自滅自滅) 흐르는 암갈색
강물의 트라우마
은행나무 연가
우리 집 은행나무는 혼자였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짝이 없던 은행나무는
연못 속에서 짝을 찾았다
그것이 제 그림자인 줄 모르고
물속에서 눈이 맞은 은행나무
물에 비친 제 그림자에 몸을 포개고
만 명도 넘게 아기를 가졌다
물방개는 망을 보고
연잎은 신방을 지켜 주었다
해마다 가지 사이에 돌멩이를 얹고
그림자에게 시집간 은행나무
한 가마니씩 은행이 나와도
그것이 그리움의 사리인 줄 몰랐다
바람이 세게 불 때마다
연못이 걱정되는 은행나무는
날마다 그쪽으로 잎을 날려 보내더니
살얼음이 연못을 덮쳤을 때 은행잎은,
연못을 꼭 안은 채 얼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