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시'조하은 시인'

조하은 시인의 시 푸른 시간은 금세 지나고 외 4편

조하은 시인 약력

충남 공주 출생   

2015 시에티카 등단

공간시 상임 시인

시에문학회 회원

시원문학회 회원

 
 

 

 

 

푸른 시간은 금세 지나가고

 

어떤 약속이나 희망 없이도

민들레 질경이 엉겅퀴 뒤엉켜

앞서거니 뒤서거니 피었다 지고

감나무 밤나무 고욤나무 주거니 받거니

저녁 밥상처럼 노을빛 가득 품었다

 

지루한 애인처럼 버리고 싶었던 오래된 집

마당 귀퉁이 반질반질하던 솥뚜껑 위로 적막이 모여든다

 

웃자란 아욱 순 뚝뚝 따 잘 익은 된장 풀어

두레밥상에 올려놓으면 몸속까지 따뜻함으로 환했던 시간

 

파란 철 대문 빛깔 다 사위고

웃음소리 빠져나간 평상

 

푸른 밥상을 마주하리라는 희망으로

녹슨 대문에 풀색 칠을 입힌다

 

멀리 예배당 종탑위로 넘어가던 햇살

미몽처럼 오래도록 걸려있다

 

 

 

 

 

 비밀의 화원

 

가슴에 들어앉은 혹이 작아졌다 커질 때

지네가 돌 틈에서 꿈틀거리던 꿈이 떠오른다

 

무화과나무와 케이폭나무가 나란한 숲을 지나니

스펑나무 뿌리들이 하늘을 향해 뻗어있다

 

허공이 불안하다

왕국을 무너뜨린 것은 나무의 뿌리

완강한 자세로 유적을 제압하고 있다

 

따프롬*의 신들과 무희를 대동하고

천년의 고요가 깨어난다

 

신이 정성을 다해 꾸민 정원에서

벌거벗은 치부를 나뭇잎으로 가려야 했던 그날도

이렇게 아득한 길이었을까

 

열대문명을 헤치고 나타났던 거대한 돌의 미소 속에서

감쪽같이 사라져버린 크메르인들의 피리소리가 들려온다

 

한번쯤 상상의 섬처럼 사라지고 싶었던 고대의 사원에서

영원한 것과 영원하지 않은 것이 뒤섞여 있는 이야기를 더듬고 있다

 

스콜이 회오리처럼 일어섰다

 

맹그로브 숲을 닮은 한 무리의 아이들이 바람 속으로 걸어간다

 

어디선가 날아온 풀씨들이 사원의 벽 틈새를 비집고 들어간다

 

사라지지 않는 문장을 은밀하게 가슴에 묻는다

 

*따프롬 -캄보디아 앙코르톰 동쪽에 위치한 사원

 

 

 

 

 

 

실종

 

파도를 끌고 오는 바람의 앞섶에서

목젖을 다 열어도 소리 나지 않는 소리꾼의 슬픔이 밀려왔다

 

신혼 일 년을 채우지 못한 누이의 오열은 수평선 저쪽에서

문득 고요해졌다

펼치는 곳마다 오타가 나오는 책

목구멍에서 온종일 찢어진 문장이 쏟아졌다

 

먹이를 노리는 상어처럼  

파도는 사나운 입을 벌리고 재빨리 이빨을 닫아버렸다

 

멀리 집어등 하나 둘 깜박이며

밤을 건너온 고깃배들 속속 돌아오는데

물고기 떼를 따라 어디쯤 흘러가 섬이 되었기를

 

바위와 파도가 만나는 곳에 울음보다 더한 것이

남겨진 자의 몫으로 쌓인다

 

혼자 맞아야 할 누이의 긴 골목에

해당화는 무심하게 꽃의 문을 열고

 

파도에 온 생애를 엎드려 둥글어진 몽돌

제 몸 깎이는 소리

 

자그락자그락

 

 

 

 

민들레의 생존법

 

아침이 되면 꽃잎을 열고 저녁이 되면 꽃잎을 닫았다

 

꽃잎 채 열기도 전에 발길에 밟히거나

갓털이 되기 전에 꽃받침이 스러져도

안간힘으로 다시 일어나 몸을 턴다

 

텅 빈 꽃대는 꽃이었던 기억을 물고 서 있다

 

바람이 꽃의 마음을 두드리면

바람의 등에 씨앗을 달고 어디로든 날아가야 한다

목적지 없이 나서는 길

가끔 아무도 원치 않는 길을 간다

 

외진 곳에 홀로 꼿꼿이 서 있거나

늘 경계를 섞고 있는 새의 영혼처럼

어딘가로 길게 돌아가고 있거나

백발이 된 머리로 바람에 흔들려 잊혀져가고 있거나

오래오래 한 자리에 우뚝 서 있는 바오밥나무의 꿈을 생각한다

 

생의 절반이 바람이었던 그는

10번째 항암의 터널을 통과하는 중이다

 

 

 

 

 

 

 

판결문

 

면역억제제를 먹는 그는 가끔

에러난 프로그램처럼 널브러진 자신을 보곤 한다

몸뚱이에서 쓱 빠져나온 또 하나의 그는

기척 없이 누워있는 몸을 바라보며 호흡을 확인하는데

예고 없이 들이닥친 채권자처럼

몸을 따고 들어와

몸 곳곳에 빨간 딱지를 붙인다

몸이 지은 부채

저당 잡힌 통증

채무를 갚기 전에는 지긋지긋한 통증의 추심에서 탈출할 수 없다

매일 날아오는 상환내역서의 목록에는

결제일과 숫자가 빼곡하다

마비와 고통의 임계점을  

어떤 방식으로 읽어야 하는 것일까

식어가는 몸 어느 귀퉁이에서

집행관의 목소리 들려온다

 

피고 K의 통증의 질량은

진통제 1095알에 낙찰되었습니다

 

예의도 목차도 없는 판결문은 타이핑되고 있다

 

통증 판결문

탁 탁

탁 탁 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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