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시'전하라 시인'

복숭아 세대 외 8편

[이름] 전하라
[약력] 2012년 계간 <스토리문학> 시 등단, 2012년 계간 <수필춘추> 수필 등단, 고려대 평생교육원 시창작과정 수료, 한국문인협회 회원, 한국현대시인협회 회원, 한국스토리문인협회 홍보이사, 은평문인협회 이사, 은평예총 사무차장,   안산문인협회 회원, 안산여성문학회 회원, 문학공원 동인, 자작나무수필 동인, 계간 <스토리문학> 편집장
시집 『발가락 옹이』 , 『구름모자 가게』
가곡집 『동강할미꽃』
가곡 작시 <봄날 연가>, <동작대교 연가>


1.복숭아세대

                                                          전하라
아점의 시간, 버스에 오른다
교통카드를 찍고 좌석을 둘러보니
푸성귀 같은 여자, 옆자리가 비어있다
나는 자리에 앉고 그녀는 내릴 준비에 분주하다
그린 미니 원피스에 연분홍빛 꿀벅지
복숭아밭을 이끌고 버스를 내리는 그녀
발걸음마다 도시가 휘청거리고
점포들이 움찔움질한다

그리고 한 남자가 내 옆에 앉았다
이중커트머리 치렁치렁한 벨트
골반까지 내려간 청바지에 설렘이 인다
쉴 새 없이 자판을 두드리는 그
무슨 화장품을 썼는지 그 남자 향에 울렁하다
지금 가고 있으니 조금만 더 기다려
응, 알았어
폰 속의 풋복숭아 음성, 귀가 달다

 

 


2.의자
                                                          전하라
어둠 속으로 뽀얀 웃음을 내미는
그대의 얼굴에 나를 포갠다
가녀린 목으로
내 목을 받쳐주는 그는
단 한 번도 내 가슴을 안아보지 못했다

나는 그대로 인해 바다가 된다
내 안에서 파도소리가 들린다
누구나 의자에서는 아이가 된다
반쯤 걸쳐진 달리의 시계가
석양을 펼치고 있다

 

 


3.두부豆腐 두부頭部 둔부臀部 
                                                          전하라
일요일 저녁
무얼 해먹을까 생각하다가
지난 금요일에 사다놓은 두부가 생각났다
아차, 스스로의 둔부를 때리며
냉장고를 여니 두부는 쉰 냄새를 풍기고 있다
갇혀있던 그가 꺼내달라고 쉰 목소리로 절규하고 있었던 것이다
팔다리가 보이지 않는 두부豆腐는 모두
두부頭部로만 이루어져 있나 보다
콩은 으깨어지고 팔팔 끓여져서도
우리 가족의 건강을 걱정하고 있었다
가족의 건강을 생각지 않고 나만 생각해온 두부
재빠르게 둔부를 움직여 슈퍼에서 새 두부를 사오며 생각한다
두부는 신선한 생각으로 채워져야 한다고

 

 

 

4.딸기네 집
                                                          전하라
모임 후 갈비를 먹기 위해 신설동으로 갔다
한턱 크게 쏘겠다는 친철함이 통해
맛스러움이 한 턱 추가됐다
다들 맛과 우정을 배에 가득 채우고
배불러 죽겠다는 엄살 아닌 엄살을 부리고 있었다
모두들 우정의 맛에 길들여지고 있을 때쯤
72번 친구가 딸기를 두 팩 사줬다

그리 예쁘지 않은 얼굴의 그녀
나는 매일 그녀를 보기 위해 그 앞을 지나간다
화장 짙은 얼굴을 한 그녀는
윈도우 안 집장촌 아가씨로 보인다
늘 갇혀있어 나다닐 수도 도망갈 수도 없는 그녀
일정한 돈을 지불해야지만 느낄 수 있는 그녀
그녀가 시들하게 입술을 뽀로통하게 내밀고 있는 날이면
나의 입술도 뽀로통해진다
그녀에게서 푸릇한 풀피리소리가 나면
내 몸도 더불어 고향의 풀밭을 거닌다

그녀는 나의 별이기에

 

 

 

5.물의 집
                                                          전하라
37도를 오르내리는 찜통더위에 매직이 시작되었다
하루에 다섯 번씩 샤워를 해대도
돌아서면 주체할 수 없이 흘러내리는 땀방울
베이킹파우더를 살포해 그들의 침범을 저지해본다
결국, 몸은 스스로 견디지 모하고 땀에게 영토를 내주고 말았다
더윙에 늘어진 뇌하수체는 코마에 빠졌다
내 몸을 수 십 년 오르내리며 호시탐탐 영토를 마련하고 싶었던 그들
이천 년 동안 세계를 방랑하며 가나안 언덕을 차지한
어떤 민족의 끈기가 가상하다
홍화반점의 중화요리도 아닌 울긋불그산 반점이
여름밤을 득득 긁어내린다
피부를 뚫고 나온 물은 저마다 집을 짓고 들어앉아
영토 확장을 꿈꾸고 있다
집 없는 설움 끝자락에 선 물의 반란
누구나 집을 짓고 살고 싶어한다


 

 

 

6.호수의 나이테
                                                          전하라
법원리 호숫가를 가보았다
오랜 가뭄 끝에 수위가 수십 미터나 내려가 있다
물이 서서히 줄어들며
호숫가에는 긴 나이테를 형성하고 있다
제 몸을 비워내야만 드러나는 호수의 나이
스스로 제살을 깎아내고 있었다
수십 년 전 자라던 나무들은 나뭇잎과 껍질을 잃어버린 채
하얀 나목으로 고향을 지키고 있다
떠나간 원주민들은 어디서 살고 있을까
앙상한 나무와 같은 천의 옷을 입고 살던 물고기들은 배를 드러내고
호수는 죽어가는 물고기처럼 물비늘만 가늘게 반짝이고 있다
그 틈에도 낚시꾼들 시름을 낚으려 채임질이 한창이다

수몰의 아픔을 보고도 수십 년 째 침묵해야만 했던 호수
마침내 그가 입을 열고 있다
물의 기억이 호수의 언어로 쓰여지고 있다

 

 

 

7.은행잎이 흩날리다
                                                          전하라
치켜든 머리 위에 노란 새들이 지저귄다
억센 바람에 쓸려간 새떼
남은 자의 웃음이 달 틈에서 날갯짓한다
달 밖으로 밀려난 낙엽이 남은 시간을 탈색한다
나의 시간도 낙엽처럼 짓이겨지는 걸까
주춤거리지 않는 시계바늘에 치켜든 목이 아프다
요리조리 굴리며 비틀어지는 소리가
바퀴를 감으며 딸려 들어간다
시계추가 철컥거리며 떨어진다
추秋의 나이테가 달빛에 춥게 떨고 있다
달 틈에서 숨 없이 운다
달에 각을 떠서 나에게 보낼 수 있다면
달큰한 잠에 들 수 있을지
고양이족 허리가 따뜻해 보인다
노란고양이와 빨간 고양이 나를 스치며 간다
웃음을 걸치며 지나가는 발가락이 노랗다
은행잎은 어느새 울지도 울리지도 않는
울 수도 없는 나의 추秋가 되어있다

 

 

 

8.안개정국
                                                     전하라
전철이 이촌역에서 동작역으로 향하고 있다
동작대교가 안개에 싸여 잘 보이지 않는다
덜컹덜컹, 안개의 뼈가 나를 떠받치고 있다
안개에 철교 윗부분만 보이지만
물을 매트래스 삼아 뛰어 놀고 있다
아파트 숲을 지나자
안개는 건물 사이사이로 틀어 박혀
전철 바퀴 밑으로 깔리는 안개
아프다는 말을
철커덕철커덕으로 대신한다
안개 없던 여름은 내겐 안개정국이었다
안개가 시나브로 생산되는 가을공장
안개는 새벽에만 다량으로 생산된다
안개를 따라가고 있는 나의 가을정국은
안개 없는 계절이길 소망해본다
빼곡한 안개가 나의 계절을 닥치는 대로 포식중이다

 

 

9.발가락 옹이
                                                          전하라
딸아이가 내 발을 들여다보더니
엄마 발가락이 왜 그래, 묻는다
나도 어려서 엄마의 발가락을 보며 그런 질문을 했던 생각이 난다
마을 앞 논으로, 모정母亭* 지나 밭으로 
발을 학대하며 고무신마저 손에 쥐고 동동거리던 어머니
예쁘지 않은 발을 보며, ‘엄마 발 좀 예쁘게 해봐’ 했는데
이제 내 발가락이 소나무 옹이처럼 퉁그러져 있다

돈이 흔치 않던 20대
너무나 사고 싶었던 예쁜 신발들
신데렐라를 꿈꾸던 나는 
값싸고 화려한 신발에 발을 구겨 넣었다
어쩌면 촌에서 자라 신데렐라콤플렉스를 느꼈는지 모른다
화장품 판촉사원으로 다니던 30대
화려한 얼굴 뒤에는 짓누르는 하이힐
결국 그로 인해 울퉁불퉁 변형되고 약해진 발
세월만큼이나 낡은 습관들이 곳곳에 분화구를 만들어
고통을 분출하고 싶었나 보다

몸에 비해 발이 작고 예쁘다는 소리를 듣던 나
옹이처럼 굳어진 습관들이 전쟁의 낙인처럼 찍혀있다
골판지처럼 갈라진 발바닥으로 빠져나간 
시간을 되돌릴 수 없지만 
다시 한 번 하이힐을 신고 서른두 살을 걷고 싶다 

*고향 마을에 있던 정자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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